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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영 사회부문 법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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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2월17일 퇴임한 고현철 전 대법관은 대법관들의 삶을 수도승에 비유했다. 휑뎅그렁한 집무실에서 산더미 같은 재판 서류와 6년간 씨름하다 물러나는 원로 법관의 퇴임사답다. 한 현직 대법관은 식곤증을 피하려고 떡과 과일로 저녁을 때우며 서류를 넘긴다고 한다. 대법관들 중에는 외부 활동을 꺼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과중한 업무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다. 어느 전직 대법원장은 임기 내내 외부 약속을 잡지 않고 집무실에서 점심을 해결했다고 한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법부는 크고 작은 신뢰의 위기를 겪어 왔다.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시국사범들에 대한 ‘살인 허가서’를 내준 오욕의 역사도 있었다. 때로는 법조비리 사건으로 손가락질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법부는 큰 틀에서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진보의 흐름에 발을 맞춰 왔다. 그 이면에는 수도승을 닮으려 애쓴 뜻있는 법관들의 노력도 있었다. 지난 1년간 사법부는 겉으로 조용해 보였지만 외부의 격변이 사건화되면서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지난해 사법 60돌 기념식에서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사법 포퓰리즘을 경계하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담장도 없는 이웃인 검찰에서 넘어오는 정치적 사건들, 정치권력의 직·간접적인 눈치 주기,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 회귀 분위기 등이 사법부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즈음부터 판사들 사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 고위직 판사는 “바람이 불기도 전에 엎드리는 분위기가 감지된다”고 말했다. ‘내부 비판이 지나치게 표출되면 사법부의 독립성을 해치려는 기도에 빌미만 줄 뿐’이라는 반론도 나왔다. 이런 과정을 곱씹어 보면, 촛불집회 사건의 ‘코드 배당’ 의혹이나 재판 간섭을 둘러싼 파문은 예고된 수순이었던 셈이다. 촛불집회 재판 중 야간집회를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대한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한 뒤 보수언론 등의 공격에 시달리다 지난달 법복을 벗은 박재영 전 판사는 ‘탄광 갱도의 독가스를 감지하는 카나리아’였다. 그럼에도 ‘촛불 코드 배당’ 의혹을 두고 일부 판사들이 경거망동해 사달이 났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0여년 정도의 판사 경력을 지닌 이들이 합리적이지 않은 의심만 가지고 집단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대법원이 ‘삼성 사건’을 놓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사법부 위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보내기로 한 결론조차 유야무야되는 상황은, 사법부가 정치권력에 이어 ‘경제권력의 도전’까지 받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한 조직이 내부고발 사건에 대응하는 태도를 보면 그 조직의 건강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사법부가 보이는 태도는 매우 실망스럽다. 의혹을 덮고 파문을 축소하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국회의 긴급 현안보고 요구에 맞추기 위해 촛불 배당 사건을 개략적으로밖에 조사할 수 없었다”는 대법원의 설명은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심판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재판을 몇 년씩 끄는 법원이 반나절 조사를 근거로 ‘문제없음’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을 누가 납득할 것인가. 김용담 법원행정처장은 2월27일 국회 답변에서 삼성 사건에 대해서도 “(논의 내용이 왜 새나갔는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데 그쳤다. 사법부는 남을 심판하는 데는 엄격하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는 너무 인색한 게 아닐까.이본영 사회부문 법조팀장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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