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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5 18:55 수정 : 2009.03.15 19:52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편집국에서

조선 정조(재위 1776~1800)의 비밀 편지(어찰)가 나온 지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정조 역사극장’의 흥행 열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대중은 어찰로 드러난 정조시대의 내밀한 정치극에 빠져들었다. 40대 군주가 70줄을 앞둔 중신 심환지(1730~1802)와 시정의 입담과 속어를 건네면서 국정을 논의하고, 조정 인사까지도 상의하는 생생한 내막이 편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더구나 심환지는 그동안 정적으로 알려진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이 아니던가.

궁궐 심중에서 권력과 학문에 대한 갈증에 시달렸던 인간 정조의 육성들은 막간극의 재미 그 자체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더 많은 텍스트를 담고 나올 해제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정조 극장의 극적인 1막에 이어, 달갑지 않은 2막을 지켜보고 있다. 어찰을 계기로 새삼 불거진 기존 역사학계와 재야 사학계 사이에 독살설 논란이 ‘만남 없는’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최근 <한겨레> 지상에서는 독살설의 오류를 지적해온 유봉학 한신대 교수와 독살설을 제기해온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이 처음 실명으로 논쟁을 벌였다. 유 교수의 신간 <개혁과 갈등의 시대-정조와 19세기>를 소개하는 인터뷰에서 촉발된 이 논쟁은 아쉽게도 성과보다 소통이 막힌 학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이 소장은 어찰 공개 뒤 독살설 허구론과 주류 학자들의 잇따른 비판 등이 ‘이덕일 죽이기’로 의심된다고 했다. 독살설은 사료의 오독과 과장일 뿐이라는 유 교수의 주장을 친노론 학자들의 비학문적 공세라고 반박했다. 유 교수도 이 소장의 반론 인터뷰가 실린 다음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사료 번역 능력 자체가 의문시되는 사람이 역사학자로 나서 유감”이라며 만나거나 글을 통한 논쟁을 계속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알려진 대로, 기존 학계에서는 노론 벽파 등의 음모로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이 소장의 견해를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며 무시해 왔다. 이에 이 소장은 학계 권력을 쥔 친노론 학자들이 정조와 벽파의 숙명적 대립을 희석시키고, 독살설 자체도 의도적으로 부인한다고 맞서왔다. 그는 더 나아가 기존 학계를 노론 사관, 일제 조선사편수회 사관을 계승했다고 싸잡아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이 소장의 견해가 모두 설득력이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했던 김용섭, 강만길 등의 근대 진보사관론자들이 노론의 행보를 비판했을 뿐 아니라, ‘간송학파’로 대표되는 친노론계 학자들을 주도적 권력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독살설의 폐해를 강조해온 일부 강단 사학자들도 대중과 눈높이로 역사인식을 교감하려 노력했는가란 비판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찰이 수집가 손에 들어간 지 40년이 지나도록 해석할 전문가를 찾지 못했다는 비화에서 보이듯 학계의 연구 역량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획기적 사료인 정조 어찰이 오히려 학계에 반목과 불신을 심화시키는 단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픈 역설이다. ‘사색당파’가 재연된 느낌마저 준다.

편견 없는 진실에 대한 탐구는 정조 시대를 움직인 인문적 동력이었다. 당파를 초월해 문예를 교류하던 그 시절 분위기는 곧 당대 문화의 품격으로 승화되었다. 정조가 침실 이름을 ‘편벽·편당되지 않게 왕도를 이끈다’는 뜻의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로 짓고 자나 깨나 그 서액을 보았다는 사실을 학자들은 새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노형석 대중문화팀장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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