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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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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가끔 <한겨레> 지면의 ‘생활광고’란을 들여다봅니다. 가장 작은 게 가로 5㎝, 세로 1㎝ 크기인 이 공간은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는 마이크 구실을 합니다. 여기엔 자잘한 일상사는 물론이고 첨예한 정치·사회적 이슈를 진솔하고, 엉뚱하고, 때론 기발하게 담아낸 광고들이 넘쳐납니다. 얼마 전 쌍둥이 자매 미진·유진씨가 낸 “꽃보다 인권”이라는 광고를 봤습니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패러디해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며 국가인권위원회 조직 축소에 반대를 표시한 것일 텐데, 그 재치에 앞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안타까움이 느껴졌습니다.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의 직제 개정령 의결로 21%의 인력이 줄게 된 인권위의 앞날이 ‘활짝 핀 꽃’이 아니라 ‘스러져 가는 꽃’으로 다가온 탓이었을 겁니다. 인권이란 게 쉽게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가치가 아니어선지, 인권위의 존재감을 피부로 느끼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1년 출범한 뒤 인권위가 한 굵직한 일들을 되짚어봤습니다. 2003년 100개 주요 기업이 입사지원서에서 출신 지역, 가족사항(성명, 출신 학교, 최종 학력, 직위 등)과 신체 사항(신장, 체중, 혈액형), 종교 등을 전부 혹은 일부 삭제했습니다. 직원 채용 때 차별 관행을 개선하라는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인 겁니다. 또 공무원 공채 때 상한 연령이 없어졌고,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제정돼 지난해 4월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산업연수생 제도를 폐지하고 고용허가제를 도입하라는 권고 역시 받아들여졌습니다. 인권위 문을 두드린 진정·상담 건수는 조직 출범 이듬해인 2002년 5451건에서 지난해엔 2만2610건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부지런히 세상의 차별을 줄이고 그늘을 걷어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권위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는 방증입니다. 인권위 조직 축소가 무엇보다 걱정되는 이유입니다. 특히나 인원 감축이 주로 별정직인 인권 운동가·활동가들에 집중된다면, 앞으로 인권위는 사실상 식물기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경제위기로 인해 올해엔 사회적 약자의 인권 악화가 어느 때보다 우려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인권위를 축소하기보다는,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우선 가치로 내건 경제와 실용주의 관점에서도 인권위 축소는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인권위는 제3세계 나라 가운데 드물게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뤄낸 대한민국이 ‘인권 선진국’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훌륭한 징표였습니다. 더욱이 인권은 21세기가 지향하는 ‘지속 가능한 성장’의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인권위 축소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2006년 유엔이 기존의 인권위원회 대신에 지위를 격상시킨 인권이사회를 출범시킨 이유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은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인권이사회 창설에 반대했지만,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뒤엔 인권위원회 이사국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인권의 가치를 옹호하고 보호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선도하는 일입니다. 인권위의 앞날은 이제 헌법재판소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헌재는 직제 개정령 의결에 대해 인권위가 제출한 권한쟁의 심판 청구와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판단해야 합니다. 헌재의 사려 깊은 판단을 기대하며, 생활광고란에 실린 ‘승윤 사랑’의 의견을 소개합니다.“인력 줄이겠다는 정부마저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인권입니다.”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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