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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수 정치부문 정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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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빛바랜 잿빛 사진에는 과거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어려웠지만 즐거웠던 추억을 되살리는 것도 있고, 지우고 싶은 기억의 사진도 있습니다. 최근 온 나라를 들썩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의 부정한 돈거래 사건은 불행히도 우울한 사진의 기억을 되살리는 쪽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전임 대통령이나 가족이 비리 혐의로 곤욕을 치르는 것을 5년 만에 다시 봅니다. “이번만은” 하고 기대했건만, 5년마다 되풀이되는 비극은 어김없이 재현됐습니다.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씨는 1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에 이어 전직 대통령 부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검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검찰 조사를 받을 처지에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7일 “저의 집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이라고 먼저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솔직담백하다고 느꼈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은 많지 않은 듯합니다. 노 전 대통령의 고해성사에서 진정성을 느끼기에는, 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의 상처가 너무 큽니다. 야당에서는 검찰 수사가 표적수사라고 주장합니다. 노 전 대통령과 그 주변에 대한 수사는 추상같은데, 여권 관련 수사는 더디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검찰이 이명박 대통령의 오랜 지기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등 여권 핵심에 대한 수사를 미적거리는 것을 보면, 야당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 전 대통령의 혐의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 전 대통령은 돈과 관련해 어느 정치인보다 도덕성을 강조했습니다. 2002년 대선 과정에서는 ‘희망 돼지저금통 캠페인’을 벌이며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강조했습니다. 재임 때는 “한나라당 대선자금의 10분의 1 이상을 썼다면 대통령직을 내놓겠다”, “로비 청탁하면 패가망신시키겠다”고도 했습니다. 국민의 배신감이 큰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라는 비아냥에도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노 전 대통령을 잘 아는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도 이 대목입니다. 며칠 전 2002년 선거대책위에서 핵심적인 일을 했던 이를 만났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다. 대선 막판 승리가 가시화되니까 ‘돈 주겠다’는 기업과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런데 노 후보가 ‘부정한 돈은 받지 맙시다’라고 정리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이 어떻게 이런 처지가 됐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는 거죠. 아직 진실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노 전 대통령 쪽은 “빚을 갚기 위해 빌린 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100만달러가 든 가방이 건네졌고, 환전을 위해 박연차 회장의 회사 직원 130명의 명의가 동원됐다”는 검찰 쪽 설명에서는 음습한 뒷거래가 연상됩니다. 노 전 대통령은 12일 다시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습니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저는 박 회장이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을 밝혀야 하는 부담을 져야 할 것”이라며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참 부끄럽고 구차하지만, 사실대로 가기로 했다”고 반박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5년마다 전임 대통령이나 가족이 돈 문제 등 재임 때 일로 검찰 수사를 받는 것은 비극입니다. 당사자의 불행일 뿐 아니라 나라의 수치이자 국민에게도 슬픈 일입니다. 이제라도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제도적 방안과 정치문화의 개선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입니다.박병수 정치부문 정치팀장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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