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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 스포츠부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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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난 6일 롯데와 에스케이의 경기가 열린 사직구장. 에스케이 박재홍의 타순 때 한 관객이 장난감 칼을 들고 경기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곧바로 안전요원에게 제지당했지만, 그는 커다란 함성을 지르는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에스케이 선수단은 경기 뒤 퇴장하면서 물병과 소주병 세례를 받았고, 버스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습니다. 연패와 빈볼 시비 등으로 부글부글 끓던 롯데 팬들의 감정이 이날 에스케이에 15연패하면서 폭발한 것이죠.우리. 참 편안함과 든든함을 느끼게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포함된 집단을 나타내며, ‘우리 아기’ ‘우리 학교’처럼 어떤 대상이 자기와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낼 때도 쓰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들과 어깨 겯고 같은 구호를 외칠 때, ‘나’는 훨씬 큰 힘을 가진 ‘우리’가 됩니다. 그 단위가 동네에서 도시로, 또 국가로 커져 갈수록 ‘우리’의 힘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됩니다. 이 ‘우리’ 의식은 집단을 한없이 기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만듭니다.
2002년 월드컵은 대한민국에 감동과 환희의 폭죽을 터뜨렸습니다. 지난 3월 김연아가 사상 처음으로 200점을 돌파하며 세계피겨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도 온 나라에 ‘행복 바이러스’가 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너희’에 대한 적개심이나 분노가 집단적으로 표출될 땐 간혹 끔찍한 사태를 불러옵니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 경기에서 응원단 사이의 폭력 사태가 두 나라의 전쟁으로 이어져 수천 명이 숨지고 수천 명이 중상을 입게 한 것이 대표적 예입니다.
지난주 끝난 프로농구가 역대 최다 관중인 120여만명을 모았고, 지난 5일에는 프로야구 모든 구장이 만원을 기록했습니다. 다양한 경기장을 찾는 관중들이 늘어난 만큼, 우리의 ‘우리’ 의식과 응원문화도 과거 구단 버스를 불태우고 응원단끼리 난투전을 벌일 때보다는 한층 성숙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우리’ 의식도 많은 것 같습니다. 92년 대선 직전 초원복집에 모였던 부산지역 기관장들 사이의 “우리가 남이가”는 어떻습니까. 역대 선거 결과는, 약해지는 듯하다가도 여전히 위력을 떨치곤 하는 지역감정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 동네’에는 장애인시설이나 화장장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우리 의식’, ‘우리 학교’나 ‘우리 지역’ 출신끼리 뭉쳐 서로 당기고 밀어주는 ‘우리’ 의식,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하층민’ 취급을 받게 하는 ‘우리’ 의식은 어떤가요.
모두가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공정한 규칙 아래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경쟁을 벌이는 것. 그리고 결과보다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것. 대결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분야를 제외한 여러 차원의 ‘우리’ 의식에서도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 자리잡아 가리라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만큼 ‘너희’도 소중함을, 그리고 ‘우리’가 누려야 할 권리를 ‘너희’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겠죠. 치우치지 않는 심판과 아울러 규칙을 어긴 데 대한 제재도 꼭 필요합니다.
참,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인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은 어떻게 됐냐고요? 그는 그 뒤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를 거쳐 국회의원을 세 차례 지냈으며, 2007년 대선을 앞두고는 한나라당 경남지역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일흔 살인 현재도 한나라당 경남도당 위원장과 대한통운 사외이사를 맡고 있군요.
김인현 스포츠부문 편집장 inhye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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