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1.18 22:44
수정 : 2009.11.1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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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택 수석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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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계엔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2년차엔 슬럼프에 빠진다”는 2년차 징크스가 있다. 한·미·일 프로야구 신인왕 수상자들을 분석해보니 이듬해 슬럼프에 빠지더라는 학술논문까지 나와 있다.
정치권에도 2년차 증후군이 있다. 대통령 2년차의 특징은 ‘나라 걱정’과 ‘역사와의 대화’다. 이명박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올해 들어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 “선진화의 초석을 놓겠다”는 말을 부쩍 자주 한다. 아펙에 가서 “인기 끌고 인심 얻는 데 관심 없다”고 하더니, 엊그제 온실가스 감축 회의에선 “역사적 국무회의”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청와대에 의원들 불러놓고는 2시간 중에 1시간40분을 혼자서 떠든다는 불만이 공개적으로 터져나올 정도로 요즘 매사에 자신감이 넘친다. 최근 수석비서관회의에선 “국회에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답변하라”고 했단다.
대통령이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나라 걱정하고 역사를 의식한다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자칫 방향을 조금이라도 잘못 잡는 날이면 이런 의욕이 나라와 후손들에게 치명적 해독을 불러올 수 있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위험수위에 가장 근접해 있다. 정말로 역사를 의식한다면 임기 안에 완성하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시행령까지 바꿔 예산심의 타당성 검토 절차를 생략하더니 환경영향 평가까지 대충대충 건너뛰려 한다. 대통령이야 임기 안에 성장률 숫자만 올려놓으면 그만이지만 그 강에서 대대손손 살아야 할 후손들은 썩은 물에 코 막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세종시 문제도 그렇다. 행정 비효율 주장은 그렇다 쳐도 ‘통일 이후’까지 걱정하다니 남북대화마저 꽉 막힌 요즘 시국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다.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표를 공개비판한 의원을 따로 격려했다는 소문까지 돌더니, 주춤하던 ‘친이’ 인사들까지 일제히 박근혜 비판에 나섰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계파정치를 부추기는 꼴이다. 언론법 문제는 4대강이나 세종시와는 조금 다르다. 현 정부 방침대로 방송 구도가 재편되면 실제로 여당 장기집권의 토대를 닦는 일이다. 이 대통령이나 여당으로선 정말로 ‘백년대계’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런 이명박식 백년대계의 최대 피해자는 국민들이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한 환경재앙이나 행정도시 포기로 인한 국토 불균형 심화도 문제지만, 언론이 보수세력에 독점되면 왜곡·편향된 정보로 결국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
이 대통령이 오지랖 넓게 백년 뒤 일까지 걱정하는 ‘여유’를 부리는 데는 야당의 ‘도움’도 컸다. 민주당은 이것저것 한마디씩 안 하는 사안이 없지만 그렇다고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도 없다. 장기적으로 진보·개혁 ‘연대’가 절실한 마당에 당장 1석 더 얻겠다고 단일화 합의까지 깨버리는 안목으론 맏형 자격이 없다. 당 대표는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지만 ‘친서민’ 브랜드를 청와대에 뺏기고도 내놓는 콘텐츠가 너무 없다. 두 차례나 아무 성과도 없이 슬그머니 국회로 들어갔는데 여전히 야당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살이 ‘웰빙 야당’이란 비판을 들어도 싸다. 이번에도 4대강 예산을 막겠다고 나섰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민사회 인사들이 희망과 대안, 2010연대 등을 잇따라 발족시키는 건 민주당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구심점도 콘텐츠도 없는데 ‘야당 기득권 세력’이란 비판까지 나오면 옛 민한당처럼 한순간에 훅 가는 수가 있다.
불도저 정부가 강산을 마구 파헤치는데도 속수무책인 야당은 존재 의미가 없다. 보수세력이 행정부, 입법부, 지방정부와 의회, 언론까지 독점하도록 방치하는 건 야당으로선 죄악이다. 이 대통령이 아니라 민주당이야말로 나라와 역사를 걱정할 때다.
김이택 수석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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