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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겸 정치부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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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말부터 ‘선임기자’로 민주당을 다시 출입하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5년 동안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을 취재하다 2005년 봄 떠났으니 딱 5년 만이다. 사람들은 낯익었다. 박지원 의원은 여전히 얄팍한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뭔가를 빼곡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황색 ‘빠이롯트 니들펜’도 10년 전 그대로다. 문희상 국회부의장은 예리한 통찰력과 독특한 표현법으로 정국 현안을 기자들에게 설명해주던 ‘봉숭아학당’을 아직도 운영하고 있었다. 김근태 전 의원은 만난 지가 6년은 족히 됐을 텐데도 얼굴과 이름은 물론 ‘문화부문 편집장’이라는 전 직책까지 정확히 기억해주는 자상함이 옛날 그대로다. 사람들 사이의 변화된 관계는 낯설었다. 지난달 31일 비주류 중진의원들이 모인 자리가 그랬다. 느지막이 박상천 의원이 나타나자, 정동영·천정배 두 의원이 일어나 정중하게 맞이하며 좌석 한가운데로 모신 뒤 좌우에 나란히 앉는 것이 아닌가. 2003년 분당, 2004년 탄핵 때 이들은 가장 대척점에 서 있었다. 당시 그들 사이에 오갔던 날선 언어들이 귓전에 아련하다. “정치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상투적인 표현조차 신선하게 다가왔다. 더 생소한 건 ‘정치 행태’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광폭 행보는 사라지고, 주판알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한때 중원을 호령하던 정동영 의원조차 지역 맹주로 안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온다. 전주 덕진의 도의원·시의원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더니, 전주시장 후보로 나온 친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것이다. 물론 이해는 된다. 자신의 지역구 시·도의원을 중앙당 마음대로 하려는 처사에 울분이 터졌을 테고, 40년 친구이자 동지를 나 몰라라 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끊임없이 가신을 내치면서 새로운 인재를 공급받으려 했고,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점을 생각하면 이해는 이해에 그칠 뿐이다. 정세균 대표에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돌파력’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야권 후보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다른 당에 내주기로 한 여러 곳이 비주류 의원들의 지역구로 드러나면서 협상은 좌초 위기에 놓였다. 정 대표가 의도한 건 아닌가 보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지역구인 무주·진안·장수·임실 네 곳의 단체장을 내주면서 협상을 벌였다면 당내 누구도 딴소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 대표로서는 “다른 당이 요구하지 않았다”고 항변할 수 있으나,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 대표만의 문제는 아니다. 누구도 자기희생을 치르려 하지 않는다. 호남의 한 중진의원은 “후보단일화로 다른 당 후보가 시장이 되면 내가 다시 당선되는 데 애로가 많아진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다른 의원은 “의원들의 자기희생이라는 것도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 나중에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을 때 나오는 것”이라며 “지금은 다들 자기 앞가림에 바쁘다”고 말했다. 얼마 전 자기 몸은 숨긴 채 총구만 적의 방향으로 내밀어 쏠 수 있는 굴절형 총기가 개발됐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자기는 손톱 하나 안 다치고 적만 쓰러뜨리려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총이다. 그런데 양쪽 다 이 총을 사용한다면? 아마 서로의 총구만 흠집내는 지루한 싸움이 계속될 것이다. 상대의 몸통을 베려면 자기 팔 하나쯤은 내줘야 한다. 그런 각오 없이는 야권 단일화도, 재집권의 가능성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김의겸 정치부문 선임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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