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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20 19:24 수정 : 2013.01.21 10:34

박용현 사회부장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차기 헌법재판소장으로 보수적인 인물을 선호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이동흡 후보자를 고집하는 건 다른 문제다. 이 후보자를 둘러싼 온갖 추문은 지면을 더럽힐까봐 일일이 나열하기도 싫을 정도다. ‘흡사마’라는 그의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애칭의 성격도 가미된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들으면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몰려온다. 보수 법조인 가운데 헌법재판소장을 맡길 만한 인물이 이토록 없다는 것인지 한탄스럽다.

이 후보자가 존경하는 인물로 알려진 미국 연방대법원장 윌리엄 렌퀴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수 법관 중 한명이었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해당하는 연방대법관으로 재직하던 중 1986년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됐다. 전임자인 워런 버거보다 더 강경한 보수주의자로 평가받았던 그는 상원 의회의 인준 과정에서 많은 논란을 거쳤지만, 표결에서는 찬성 65 대 반대 33으로,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지를 얻었다.

특히 연방대법원 동료들로부터는 한결같은 성원을 받았다. 이념적으로 반대쪽에 서 있던 대법관들도 기꺼이 지지했다. 그뿐만 아니다. 판사들을 보좌하는 연구관이나 하급 직원들까지도 기뻐했다고 한다. 렌퀴스트는 비록 판결에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굽히지 않았지만, 합리적 사고와 성품으로 진보·보수 양쪽으로부터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가장 진보적인 대법관이었던 윌리엄 브레넌조차 그를 ‘베스트 프렌드’라고 할 정도였다.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보수 성향의 대법관인 앤터닌 스캘리아의 인준 과정도 흥미롭다. 그는 상원 의회의 인준 투표를 찬성 98 대 반대 0, 말 그대로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미국 최초의 이탈리아계 대법관 후보자라는 정치적 명분 등 몇가지 이로운 상황이 있었다고는 해도, 이처럼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건 법률가로서의 실력과 공직자로서의 자질에 흠잡을 데가 그만큼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캘리아는 지나치게 완고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판결을 통해 보수적인 법률 이론을 탁월하게 전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진보 쪽에서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우리의 헌법재판소나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헌법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 권한을 갖는 기관이다. 국회에서 만든 법도 한칼에 무효로 만들 수 있다. 특히 헌법에 선언적으로만 규정된 국민의 기본권 조항에 살을 입혀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재규정하는 구실을 맡는다. 헌재의 결정으로 우리의 기본권이 확장될 수도, 축소될 수도 있다. 실로 막강하면서도 중차대한 권한이다.

여기서 문제는 헌재 재판관이 국민의 직접적인 선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헌재)이 선출된 권력(국회)의 의사 결정을 뒤엎을 수도 있다는 모순이 생겨난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재판관들의 뛰어난 자질과 이에 대한 국민의 신뢰밖에 없다. 그러자면 정치적 성향을 떠나 국민 대다수가 사고의 합리성, 기본권 문제에 대한 소양, 인간적인 풍모와 양심적인 삶의 태도 등에 신뢰를 보내는 인물을 뽑아 앉혀야 한다. 이강국 헌재 소장이 “재판관 선출을 의회 과반이 아니라 3분의 2 이상 찬성을 요건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게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헌재 소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헌재 재판관이 되는 것은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일종의 쿠데타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동흡 후보자를 밀어붙이는 건 한국 보수의 수준에 대한 초라한 고백일 뿐만 아니라, 국민에 대한 위험한 도전이다.

박용현 사회부장 piao@hani.co.kr

[관련영상] '이동흡은 공직자가 아니무니다' (김어준의 뉴욕타임스 20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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