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3 19:13
수정 : 2013.02.03 19:15
|
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
|
‘대중문화평론가’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내세워 <한겨레>에 칼럼을 쓰는 임범은 원래 우리 신문사 기자였다. 20년 넘게 인사동 골목을 헤매며 함께 술을 마셔줬더니, 돌아온 건 헐뜯기였다. 몇해 전 <내가 만난 술꾼>이란 책을 내면서, 나를 ‘발도 안 씻는 게으른 인간’으로 묘사한 것이다. 며칠 전 오래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문제의 책을 뒤늦게 읽어본 것이다. “야, 너 게으른 건 나만 아는 줄 알았는데…. 회사 윗분들도 아냐? 아, 그러면 너 승진 못 하는데….”
게으름을 공인받다 보니, 박근혜 당선인의 인사를 보면서도 정치성향이나 도덕성보다는 부지런함이 더 눈에 들어왔다. 문제인사 3인방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윤창중 대변인은 <문화일보> 논설위원 시절, 새벽 5시면 칼같이 출근해 그날 다룰 소재와 나갈 방향을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다른 논설위원들이 설사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 완벽함에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단다. 기자 초년시절을 영자지와 방송사에서 보내다 보니 <세계일보>로 옮겼을 때는 기사 작성이 좀 서툴렀는데 그걸 만회하기 위해 ‘~로 분석된다’ 등 신문에서 쓰는 용어들을 대학노트 한권에 빼곡히 정리해서 틈만 나면 들여다봤다고도 한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생계형 권력주의자’라는 불명예스런 별칭을 얻었지만, 바지런함에서는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한다. 틈틈이 외국어를 공부해 영어·일어는 물론 중국어까지 능통하단다. 주변 사람들이 나태한 것도 참질 못했다. 민사집중심리제 연구다 공정거래법 연구다 해서 후배 판사들을 새벽에 나오게 해 매일 한시간씩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법원 내 평가가 그토록 짠 것은, 들볶인 후배들의 반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19살에 고등고시에 수석 합격한 것만으로도 근면성실의 표상이다. 그의 행적을 보며 한번 더 놀란 건, 2000년 헌법재판소장 퇴임 이후 닷새 만에 법무법인(로펌)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점이다. 전관예우 의혹이 제기됐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40년을 쉬지 않고 일했으면서도, 바로 또 일을 하고 싶은지 그 두뇌구조가 더 궁금했다.
이들은 모두 보수적 색채가 짙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정치 성향과 부지런함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부지런한 결과로 사회적 지위와 재산상 이득을 이룩한 사람이라면 그러지 못한 사람을 게으름뱅이라고 비아냥거릴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진보 쪽이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넘본다고 생각하면 적개심이 커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그 부지런함이 개인적 성취 차원을 넘어서 탐욕의 수준으로까지 번지면 공동체는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박근혜 당선인이 앞으로 사람을 고를 때는 좀 게으른 사람을 골랐으면 좋겠다. 욕망을 좇기에는 몸이 따라주질 않는 사람 말이다. 그러면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사회적 구조나 행운에 기인한 것임을 인정하는, 최소한의 겸손함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대한 편일 테니 박 당선인이 내건 복지국가와도 잘 어울릴 것이다.
효율성 면에서도 그렇다. 독일의 어느 장군이 군대 장교를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는데, 지도자 감으로는 머리 좋고 게으른 사람이 제일 낫다고 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명석함과 침착함 때문이다. 머리 좋고 부지런한 사람은 그저 참모를 맡기면 된단다. 피해야 할 유형은 머리 나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부지런을 피우고 수선을 떨어 조직을 망가뜨린다. 그럼 우리처럼 머리 나쁘고 게으른 사람은 어떠냐고? 조직의 90%를 차지하는 유형으로, 기계적이고 틀에 박힌 일을 하기에 적합하단다.
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
kyummy@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