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19 18:58
수정 : 2013.06.1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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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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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1일 새벽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금강산 해수욕장을 거닐다 북쪽 인민군 초병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열하루 뒤 싱가포르에서 아세안지역포럼(ARF)이 열렸다. 이명박 정부는 금강산 피격 사건으로 북한을 압박하려 총력 외교전을 펼쳤다. “속옷은 동네 한가운데서 말리지 않는 법”(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이라며 많은 이들이 남북 현안을 국제화하는 걸 우려했지만, 정부는 오불관언이었다. 회의 사흘째 발표된 의장성명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에 관심 표명…조속 해결 기대”와 함께, 북쪽이 제안한 “10·4 (남북)정상선언에 기반을 둔 남북대화의 지속적 발전에 강력한 지지 표명”도 담겼다. 한국 대표단은 “10·4 정상선언에 기반을 둔”이라는 표현을 의장성명에서 빼달라고 의장국인 싱가포르에 요청했다. 싱가포르는 “둘 다 빼거나 둘 다 살리거나 양자택일하라”고 했고, 한국 대표단은 둘 다 빼는 쪽을 택했다. 2007년 유엔 총회에서 10·4 정상선언 환영·지지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국제사회는 경악했다. 10·4 정상선언은 그렇게 이명박 정부에 의해 ‘참수’됐다. 그 뒤 5년간 남북 교류협력 성과는 잿더미가 됐다.
박근혜 정부 출범 101일 만에 느닷없이 다가온 남북 당국회담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정상화,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화해협력을 본궤도에 올리고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킬 소중한 불씨였다. 그런데 남과 북이 수석대표의 ‘격’을 두고 다투다 밥상을 뒤엎었다. 청와대는 “양비론은 북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며 망언을 일삼고, 통일부는 “새로운 남북관계로 가기 위한 진통”이라며 여유만만이다. 뒤엎어진 밥상 앞에서 망연자실한 개성공단 입주업체들, 현대아산 등 금강산관광사업 관련 업체와 강원도 고성군 주민들, 피붙이 만날 날만 꼽아온 노령의 이산가족들의 피눈물은 어쩌란 말인가. 교각살우.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2008년 7월 싱가포르에서의 그 ‘외교적 자살’이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은 ‘격’ 논란을 정당화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입에 달고 사는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내용 중시 방침과 상충한다. 두 발언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일리가 없진 않다. 하지만 ‘절반의 진실은 때로 거짓보다 더 나쁘다’는 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의 이런 ‘그때그때 달라요’식 모순어법을 관통하는 건 ‘북한 불신’이다. 불신으로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작동시킬 수 없다.
이 와중에 북한이 제안한 북-미 고위급회담을, 미국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하겠다”며 일단 옆으로 밀쳐뒀다. 이걸로 끝일까. 아니다. 머잖아 북-미 사이에 물밑 접촉이 이뤄질 거다. 얘기가 잘되면 북쪽이 영변 핵활동 유예 등 ‘북-미 2·29 합의’ 이행에 나서고 북-미 대화가 전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대화 국면 전환이 어렵다고 북한이 판단하면, 최악의 경우 장거리로켓 발사와 핵실험 따위로 한반도 정세를 또다시 뒤흔들려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한국이 상황을 주도적으로 풀어갈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게 문제다.
남북 당국회담 무산으로 밥상은 엎어졌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한낮의 어둠이다. 남북 교류협력 제로 시대, 서럽고 또 서럽다. ‘격’ 논란이 박근혜 정부의 무지 탓이면 좋겠다. 무지는 공부로 깨칠 수 있기 때문이다. 회담을 깨려는 술수였다면? 절망이다. 그나저나 27일 한-중 정상회담은 희망의 메시지를 타전할 수 있을까.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은데….
이제훈 국제부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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