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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07 19:08 수정 : 2013.07.07 19:08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고정관념이었을까. 그동안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근래 잇따라 벌어졌다. 시작은 검찰이었다. 검사동일체, 곧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전국 검사들이 상명하복 관계를 유지하며 한 몸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던 검찰에서 지난해 말 검사들이 총장에게 집단 반발하는 ‘검란’이 벌어졌다. 아래로 칼을 들이대고 위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 덤비는 모습은 이미 ‘동일체’가 아니다.

한국 검찰의 상징이 ‘검사동일체’라면, 정보기관은 익명성, 그림자 따위로 상징된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옛 중앙정보부의 구호나,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고 새긴 국가정보원 청사의 표지석이 대표적이다. 그런 ‘음지’와 ‘무명’의 ‘헌신’이 무색하게도, 지금 국정원은 햇빛 쨍쨍한 광장에서 정치인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정치를 한다. 인터넷에 정치 댓글을 달고, 그런 사실이 드러나 궁지에 몰리자 6년 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단으로 공개해 정국을 뒤집으려 했다.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늘에서 이름 없는 존재로 몸 바치겠다던 이들이 내놓고 ‘명예’를 주장한 것이다. 과연 명예 때문일까.

자신을 규정하는 상징까지 깼다면 중대한 변란이다. 왜 그랬는지는 이미 드러나 있다. 검란의 경우, 대검 중수부를 폐지하겠다는 검찰총장의 언급이 집단 반발을 확산시켰다. 그들에게는 수사권이라는 큰 칼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조직의 이해가 곧 물러갈 검찰총장보다 중요했다.

국정원은 더 노골적이다.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에는 ‘조직 보위’ 말고 다른 이유와 필요를 찾을 수 없다. 비밀 문서를, 그것도 내용을 왜곡하면서까지 흘리는 것이 국익에 큰 해가 된다는 상식적인 걱정도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국가정보기관 스스로 정보를 누출한다는 비아냥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댓글사건 물타기라는 다수 여론의 눈길도 무시했다. 국정조사로 치부가 드러나고 개혁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기세다.

이쯤 되면 조직이기주의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조직의 힘을 지키겠다고 국익이나 법, 오래 지켜온 원칙 따위도 내팽개치는 데선, 생존 본능이 우선인 거대한 괴물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처럼, 국가가 필요에 따라 만든 기관이 되레 그 조직의 이해를 앞세워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풍경이다.

그런 일이 어디까지 이어질지가 더 걱정이다. 검찰은 대검 중수부 간판을 내린 대신, 대체 조직의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가칭 반부패부라는 지휘부를 두고, 실제 수사 역량은 지방검찰청에 옮기는 식이다. 기소와 수사를 독점한 검찰 권력의 축소, 정치적 중립 확보 등 검찰 개혁의 본질은 실종되고, 검찰의 힘은 어떻게든 보존하겠다는 의지만 남았다. 국정원의 힘은 더 커진다. 최근 발표된 국가 사이버안보 종합대책에선 국정원이 사이버안보의 실질적 총괄 권한을 맡게 돼 있다. 그리되면 민간 부문까지 사이버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여론 조작과 정치 개입의 엄청난 일탈을 저지른 조직에 제동은커녕 칼을 더 쥐여주는 꼴이다. 그런 일이 국민의 일상을 위협하게 된다는 점에서 거대 국정원의 거침없는 진격은 더욱 위험하다.

많은 신화가 거인과의 싸움, 혹은 거인이 대지나 강 등 자연으로 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거인으로 상징된 자연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 신화일 수도 있겠다. 민주주의의 역사도 거대 권력과의 싸움일 수 있다. 특히 검찰이나 정보기관 등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통제는 민주주의를 유지, 작동하는 데 중요하다. 그 거대 권력이 이미 위험한 이빨을 드러냈는데도 지금 당장 유리하다고 방치하면 큰 화를 입게 된다. 거인이 언제까지 내 편이겠는가.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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