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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17 19:23 수정 : 2013.07.17 19:23

이제훈 국제부장

정부서울청사 별관 17층 외교부 장관실은 전망이 좋다. 탁 트인 통유리창으로 서울의 주산인 백악(북악산)이 한눈 가득 들어온다. 그런데 유리창 여기저기에 원통형의 작고 검은 물체가 붙어 있다. 뭘까? 몇년 전 그 방의 주인에게 물었더니, 유리창의 떨림을 감지해 장관실 내부의 대화를 엿듣는 걸 막으려는 장치란다. 누가 도청을? 방 주인은 빙그레 웃을 뿐 답이 없었다. 오랜 탐문 끝에 나름의 답을 얻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생각해보면,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197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는 ‘코리아게이트’를 특종 보도하며 미 중앙정보국이 청와대를 이런 방식으로 도청하다 알아냈다고 전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한국 등 38개 우방국의 주미 공관을 도청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에드워드 스노든의 문서를 근거로 폭로하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정보기관을 가진 모든 나라들은… 각국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려고 한다”며 ‘능력 있으면 너네도 해봐’라고 되받았을 때, 외교부 장관실의 그 검은 원통형 물체가 떠올랐다. 국가안보국이 ‘프리즘’이라는 감시프로그램을 활용해 세계 각국의 전화·컴퓨터망을 감시·분석한다는 사실이 폭로됐을 때도, 미국 정부는 ‘합법’과 ‘테러 예방’만을 읊조렸다. 조폭의 ‘배째라’와 다를 게 없다.

이 와중에 국가정보원은 “댓글천국 무플지옥”을 모토로 “홍어·절라디언들 죽여버려야” 따위의 댓글을 달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단 공개하는 등 정치공작에 여념이 없다.

미국이 ‘빅브러더’라는 건, 구체적인 증거가 새로 나왔을 뿐, 예상 밖의 일이 아니다. 놀랄 일은 다른 데 있다. ‘윤창중 성추행 사건’과 아시아나 여객기 착륙 사고 직후 미국 사회가 보여준 피해자 보호 조처가 바로 그것이다. 윤창중 사건 때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피해 여성과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세계 언론 어디에도 피해 여성과 신고자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이나 육성이 노출되지 않았다. 아시아나기 사고 직후에도 병원에 입원한 탑승객에 대한 언론의 접근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기자들이야 답답한 노릇이지만, 그 덕에 피해자의 인권과 사생활이 보호됐다. 미국 법률(DC Code section 22-722 Obstructing Justice 중 Prohibited acts: penalty)에 따르면, 당사자가 원치 않는데 접촉하려다 걸리면 사법방해죄로 3년 이상~30년 이하 징역형 또는 1만달러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한국에서라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윤창중 사건의 피해 여성과 신고자는 일부 누리꾼들한테 일찌감치 신상이 털렸을 테고, 집 앞에 진을 친 기자들 탓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을 거다. 아시아나기 사고 탑승객이 입원한 병실에도 카메라가 밀고 들어갔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고.

축구 선수 기성용이 가까운 이들만 볼 수 있는 비공개 페이스북 계정에 최강희 감독이 축구 국가대표팀 운영 과정에서 해외파를 차별한다는 취지의 글을 쓴 일로 세상이 시끄럽다. 누리꾼들이 들고일어나자 대한축구협회가 징계를 논의했고, 홍명보 새 축구대표팀 감독은 사실상 에스엔에스(SNS)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기성용의 ‘싸가지’를 질책하는 소리는 넘쳐나는데, 비공개 글을 당사자 동의도 받지 않고 까발려 사생활을 침해한 축구평론가를 탓하는 이는 거의 없다.

생각해볼 일이다. ‘빅브러더’에도,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 침해에도, 국정원의 수치스런 행태에도 무감하다면 누가 우리를 지켜줄지. 사람들은 타인한테서 모욕당하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를 모욕한다는 오래된 말도 함께.

이제훈 국제부장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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