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4 18:48
수정 : 2013.08.0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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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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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류현진의 위기관리 능력은 감탄할 만했다. 매회 안타를 맞고도 삼진이나 땅볼, 병살타를 유도해 실점을 최소화했다. 운 이상의 실력이다. 사실 ‘위기관리’는 기업 세계에서 발달한 논의다. 조직이나 개인이 위기에 빠졌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위기관리다. 경영학이나 커뮤니케이션학에서 정리된 위기관리 이론은 ‘사실을 직시하고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을 덕목으로 꼽는다. 신속하고 일관된 대응을 할 것, 거짓말을 하지 말 것, 최고책임자가 나설 것, 재발 방지 대책 등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꿀 것 따위도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내놓는 지침들이다. 그런 이론과 지침을 무색하게 하는 일이 요즘 벌어지고 있다.
에스케이(SK)그룹은 최태원 회장 재판으로 몇 년째 위기를 겪고 있다. 최 회장은 계열사 돈 수백억원을 빼내 선물 투자에 쓴 혐의를 받고 있다. 거칠게 말해, 회삿돈으로 대형 도박을 했다는 것이다. 최 회장 쪽은 애초 이를 부인했다. ‘형(최 회장) 몰래 동생(최재원 부회장)이 벌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가 ‘형이 동생에게 책임을 떠넘겼다’며 되레 형을 법정구속하고 동생을 풀어주자, 항소심에선 말이 바뀌었다. ‘1심에서 거짓 진술을 했다. 펀드 조성엔 형이 관여했지만, 선물 투자로 돈을 횡령한 것은 해외 도피 중인 김원홍씨’라고 주장했다. 재판에서 ‘최 회장이 선물 투자도 결정했다’는 상반된 증언이 나오자 다시 말이 바뀌었다. ‘김씨의 요구로 펀드를 조성하고 돈을 내줬지만, 이미 6천억원대의 사기를 당한 데 이어 또 속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그 얼마 뒤 김씨가 대만에서 체포됐다. 최 회장은 체포 직전 김씨를 뒤늦게 고소했다. 우연일까.
이런 대응에서 일관성이나 솔직함은 찾기 어렵다. 앞의 거짓말을 뒤의 말로 뒤집는 일이 계속된 탓이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최 회장을 감옥에서 빼내는 것이 애초 위기관리의 목표였다면 성공을 기대할 수도 있겠다. 김씨 체포로 이번 사건이 ‘김원홍의 사기 사건’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 회장의 법적 책임이 감경되더라도 그 대가는 참혹하다. 그는 일확천금에 눈이 먼 사람에서, 동생을 대신 감옥에 보내려던 사람으로, 다시 사기에 속아 회삿돈을 쏟아부은 사람이 돼버렸다. 누가 그런 이를 믿을 수 있을까. ‘오너 리스크’는 이전보다 커졌다고 봐야 한다. 눈앞의 불을 끄겠다고 좌충우돌해 또다른 위험으로 기업 전체를 몰아넣은 결과다.
국가정보원은 더하다. 댓글 의혹 사건은 국정원의 큰 위기였다. 국정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을 쟁점화하는 것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사실을 직시하고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눈앞의 불을 피하겠다고 사방 천지에 온통 맞불을 놓은 형국이다. 그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온몸을 드러내 몸부림을 치면서 국정원은 현실 정치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돼왔던 금기는 이로써 깨졌다.
따지자면 10·26 사건이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나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 결과다. 지금 남재준 국정원장이 주도하는 노골적인 정치개입에 대해서도 안팎의 제동장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두면 더 기막힌 일도 벌어질 수 있겠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은 재발 방지 장치 등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때 가능하다. 기업으로선 오너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겠고, 국정원으로서는 문민 통제 시스템 등 국정원 개혁일 터이다. 그런 목소리는 무성한데,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듣고나 있는지 걱정된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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