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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29 19:11 수정 : 2013.09.29 19:11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피고인의 구속으로 인해 그룹의 경영 공백 상태를 초래해 국민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등을 고려했다.”

지난 2006년 6월 법원은 수백억원의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로 그해 4월 구속기소된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에게 보석을 허가하면서 ‘국민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이유로 댔다. 애초 참여정부 청와대의 분위기는 “정 회장이 나오더라도 여름이 지나야 할 것”이라는 쪽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빠른 석방 쪽으로 바뀌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여러 대형 사건에서 불구속·보석·집행유예 등을 이끌어낸 국내 최대의 로펌 ‘김앤장’의 힘일 수도 있고, 현대차의 전방위 로비가 먹힌 것일 수도 있다.

이젠 달라진 것일까. 법원은 그제 회삿돈 수백억원을 빼돌려 선물투자에 썼다는 최태원 에스케이그룹 회장 형제 사건 항소심에서 “대규모 기업집단의 최고경영자가 지위를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할 경우 국가경제 질서의 근간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며 형제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그 전날 대법원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위장 계열사에 대한 지원이 과연 김 회장 등이 아닌 한화그룹 소속 계열회사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라며 배임죄를 인정했다. 총수 구속으로 인한 경영 공백과 경제 피해를 걱정하던 법원이, 이제는 그룹과 총수의 이익을 구분하면서 ‘국가경제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격세지감’은 또 있다. 불과 몇 년 사이 기업인 범죄 사건에서 대형 로펌의 위력은 급락했다. 에스케이 사건에서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은 수사 과정과 재판마다 이리저리 ‘스토리’를 짜고 말을 맞추는 등 사실상 위증을 꾸몄지만, 실형 선고를 막진 못했다. 김앤장이 맡은 태광·피죤·한화·엘아이지 그룹 사건이 하나같이 같은 결과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재벌 총수를 징역살이시킨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지만, 지금은 재벌가의 모자·부자·형제에게 동시에 실형을 선고하는 일까지 예사롭게 벌어진다. 법원 관계자는 “그냥 양형기준대로 선고했다”고 설명했다. 원칙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판결이 한두 판사의 일도 아니다. 재벌 총수 사건에 정찰제처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던 얼마 전과 달리, 지금은 대부분 실형에 구속이다. 배임·횡령·탈세 등 기업인 범죄를 엄단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제 원칙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다. 기업에는 총수라고 계열사를 맘대로 부리거나 회삿돈을 함부로 써선 안 된다는 경고가 돼, 지배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재촉하는 일이 된다. 그러니 깐깐한 판사 한둘이 원칙을 앞세워 재판에서 심통을 부린다고 한들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그런 이들이 사법부의 기둥일 수 있다.

정작 걱정은 다른 쪽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 대기업 총수들에게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나 과도한 규제로 변질되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전에는 잇따른 화학물질 유출 사고 뒤 여야 합의로 마련한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 대해 “기업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소관 부처에 지시했다. 최고 권력자가 애초 약속했던 경제민주화나 국민 안전 대신 그렇게 대기업의 불편을 줄이는 일을 앞세우자, 온통 그 뒤를 따르기 바쁘다. 국회에선 경제민주화 입법에 제동이 걸렸고, 정부는 이미 법률이 시행됐는데도 시행령으로 기업 부담을 낮춰주기로 했다.

사법부는 어떨까. 지난 5월 대통령이 통상임금 문제의 해결을 기업 쪽에 약속한 뒤, 대법원은 통상임금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넘겨 판례 변경 가능성을 열었다. 의심이 크게 늘어난 터에, 양승태 대법원장은 공개변론에서 통상임금 확대의 경제적 영향을 집중적으로 물었다. 시간을 거스른 듯한 분위기가 이제야 당연한 원칙을 당연하게 적용하게 된 일선 판사들에게 다시 압박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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