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22 19:05
수정 : 2013.12.2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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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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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저잣거리 얘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지난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판결은 앞과 뒤가 판이했다. 앞 대목에 환호했던 이들은 뒤 대목에서 어안이 벙벙했다. 나중에 곱씹어보니 복장 터지는 결과였다. 지켜보는 이도 속은 느낌이었는데 오죽하겠는가.
대법관 13명 가운데 다수가 찬성한 판결은 이렇게 요약된다.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 이것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노사가 합의했더라도 그런 합의는 근로기준법에 위배돼 무효다. 하지만, 근로자가 이를 이유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계산한 수당과 퇴직금을 추가로 청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위배돼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의 앞부분은 그동안 이 문제에서 어깃장을 놓아온 기업계 등의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또다른 논란의 불씨가 있긴 하지만, 법리적 논란은 꽤 정리됐다. 특히 둘째 문장은 통상임금의 강행규정성, 즉 노사 당사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근로자 보호를 위해 강제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그 ‘하지만’의 바로 뒤에서 이런 원칙론은 백지화된다. 다수의견은 방금 인정한 강행규정성을 ‘신의칙’으로 배척할 수 있다며, 근로자 쪽 완패를 선고했다.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당혹감마저 든다”고 대법관 3인의 소수의견은 다수의견에 경악했다. 그럴 만도 하다. “신의칙이 강행규정에 앞설 수 없다”는 것은 법학 입문이라는 민법 총칙에서도 학기 초에 배우는 원칙이고, 대법원도 여러 판례에서 거듭 확인한 당연한 전제다. 이를 깼으니 위험한 선례다. 소수의견은 분개한다. “다수의견의 태도는 강행규정에 반해 무효인 법률행위를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법관이 신의칙을 동원해 마음대로 박탈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다수의견은 타당성 있는 논리적 뒷받침 없이 단순히 ‘원고(근로자)가 피고(기업)로부터 연·월차수당과 퇴직금을 더 받아가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런 억지가 나왔는지는 판결문에 나온다. 다수의견은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했던 게 그동안의 ‘관행’이었고, 그렇게 ‘신뢰’해온 터에 추가임금을 요구하면 사용자의 부담이 커져 ‘기업의 존립’이 위태롭게 된다고 설명한다. 신의칙 위배 주장의 뼈대다. 소수의견이 ‘그런 관행과 신뢰의 근거가 대체 어디 있느냐’며 “사용자는 합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지 무슨 ‘손해’를 입는 것이 아니다”라는데도, 다수의견은 요지부동이다. 노동법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계약법의 논리를 내세워 기업 쪽의 ‘막대한 손해’를 거듭 강조한다. 지금까지의 위법은 불문에 부치겠다는 이유가 결국 기업 경영에 대한 걱정이다.
법원이 법원칙 대신 그렇게 기업의 경영을 더 걱정하는 것이 실은 더 걱정해야 할 문제일 수 있다. 소수의견의 지적대로 “최고의 법해석 기관인 대법원은 법리를 법에 따라 선언”하면 된다. “그에 따른 경제적 우려를 최소화하는 것은 정부와 기업의 역할”이다. “대법원이 앞으로의 노동정책까지 고려해 현행 법률의 해석을 거기에 맞추려 한다면 법해석의 왜곡”일 뿐이다. 그 와중에 국민의 권리 침해를 사후적으로 구제해야 하는 법원의 본래 역할은 내팽개쳐졌다. 사법에 대한 신뢰를 뿌리부터 흔드는, 중대한 일탈이다. 기업의 경영과 안위를 걱정하며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 구제를 배척한 이번 판결이, 국가안보와 사회안녕을 앞세워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처벌했던 과거 어떤 시대 판결의 사고방식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지도 묻게 된다.
그래서 이번 판결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고쳐져야 한다. ‘옹색한 절충’이라는 애초 평가는 너무 후했다. 기업 쪽과 청와대의 걱정을 일거에 풀어주려 억지 꿰맞추기를 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고, 그 결과 사법과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위태롭게 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위험한 영합’이다. 그것도 후해 보인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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