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19 19:04
수정 : 2014.01.1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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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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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한 영화 <변호인>에는 울컥하는 지점이 몇 있다. 많은 이들은 그중에서도 송우석 변호사가 고문 경찰관을 증언대에 세운 법정에서 벌겋게 상기된 채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변론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감시하고, 금지하고, 고문하고, 처벌하는 권력이 아니라, 국민이 바로 국가의 주인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눈물과 함께 외쳐야 했던 그런 시대를 우리가 살았다. 그 시점을 한참 지나온 지금, 국민은 주인인가.
2012년 대선 때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2012년 12월2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는 검찰개혁 공약을 발표하면서, “국민으로부터 나온 검찰권을 국민에게 되돌려드리겠다”며 “권력을 위한 검찰이 아니라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약속은 1년 사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당시 박 후보는 검찰 쇄신책의 첫째로, “독립성과 중립성 확보를 위해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인사제도를 확립하겠다”고 밝혔다. 인사가 검찰개혁의 핵심이라는 시대적 공감에 따른 것이겠다. 하지만 1년여 만인 지난달 검사장급 인사와 얼마 전 중간간부 인사는 약속과 한참 거리가 멀다. 당시 박 후보는 “검찰인사위원회에 실질적 권한을 부여해 검사장들의 승진·보직 인사를 엄정하게 심사하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검찰청법에 따라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은 법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한 인사에서 검찰인사위원회가 실질적 권한을 갖고 심사를 한 흔적은 없다. 대신 권력의 의중, 권력 실세와의 친소, 출신 지역을 앞세운 인사 운동 따위 얘기만 예전처럼 무성했다. “검사의 법무부 및 외부기관 파견을 제한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법무부는 여전히 검사 일색이고 외부 파견도 그대로다.
무엇보다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 확보’에 맞는 인사가 아니다. 살아있는 권력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찍어내기’를 당했다는 의심이 굳어진 터에,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과 찍어내기에 반발했던 검사가 한직으로 좌천됐다. 대신 사건 축소를 주장해 수사팀과 갈등을 빚은 공안검사는 성추행을 했는데도 징계는커녕 좋은 자리로 옮겼다. 인사를 당근과 채찍 삼아 검사들을 좌지우지하던 지난 정권 때와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인사의 기준이 ‘권력의 입맛’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하면, 검찰 조직은 이를 행동 잣대로 삼게 된다. 수십년 겪은 일이다. 그 때문에 인사의 독립 등 검찰개혁이 주장됐던 것인데, 1년도 안 돼 시곗바늘이 되돌려졌다.
이제 남은 것은 대검 창고로 보내진 중수부 간판뿐이다. 박 후보 쪽 검찰개혁안의 뼈대였던 상설특검 설치는 허송세월을 거듭하다 지금의 특검 제도와 다를 게 없는 제도특검으로 후퇴했다. 독점적 기소권은 물론 다른 나라에선 유례를 찾기 힘든 수사권까지 큰 훼손 없이 그대로 행사하게 된 비대 검찰은 다시 권력의 ‘쓰기 좋은 칼’로 돌아왔다. 하는 일도 그대로다. 여당 의원들이 관련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의혹 사건이나 청와대 인사의 연루가 의심되는 채동욱 전 총장 관련 개인정보 불법유출 사건은 지난 수십년 그랬던 것처럼 흐지부지 무혐의 처리로 향하거나 미적미적 미궁 속으로 빠뜨려지고 있다. 대신 파업을 이끈 철도노조 간부들에 대해선 법원의 확립된 판례까지 비틀어가며 구속과 처벌을 밀어붙인다.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행동”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서슬은 공안검찰에 의해 현실이 된다.
결핵 환자가 약을 처방대로 복용하지 않거나 중도에 복용을 중단하면 치료제도 듣지 않는 내성결핵으로 악화할 수 있다고 한다. 개혁이란 말만 꺼내다 중단된 검찰도 과거보다 더 지독한 ‘정치검찰’, ‘특권검찰’, ‘비리검찰’로 빠져들 수 있다. 벌써 그리된 듯하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아득하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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