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5 19:06
수정 : 2014.03.0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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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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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몰이가 거세다. 연초 ‘대박통일론’을 제기한 데 이어 취임 한돌을 맞은 2월25일엔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헌법기구이자 대통령이 의장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통일 실현이 존재 이유인 통일부가 있는데도 이런 방침을 밝힌 건 그만큼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다는 방증일 터. 대통령의 행보만 보면 통일이 문 앞에 다가온 듯하다. 대통령의 통일몰이는 성격과 차원이 전혀 다른 두 갈래 판단이 착종된 결과로 보인다. 대통령은 북한의 급변사태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아울러 대통령이 가장 잘한 게 외교안보 정책이라는 여론의 공고한 지지세를 앞으로도 유지·강화하려는 정치적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후한 평가는 전문가 그룹에서도 나타난다. <내일신문>이 최근 정치외교학 또는 북한학을 전공한 전문가 1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박근혜 정부가 외교안보 정책을 ‘잘한다’는 응답이 68.7%에 이른다. 그런데 이상하다. 박 대통령의 간판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실효성을 두고는 부정 평가가 71.3%로 긍정 평가(28.0%)를 압도했다. 총론은 우등인데, 각론은 낙제다. 이런 모순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문제를 하나 풀어보자.
다음 중 박근혜 정부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 품목에 해당하는 것은?
①쌀 ②옥수수 ③밀가루 ④분유
다 답인 거 같나? 아니다. ‘분유’만 답이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순수 인도적 지원은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지속 추진하겠다’고 거듭 강조하며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를 꾀했다. 통일부 자료를 봐도 ‘인도적 문제의 지속적 해결 추구’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첫 단계의 첫 실행 과제로 명시돼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몇년 새 다소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북녘은 여전히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그런데 북녘 동포의 굶주림을 눅이는 데 보탬이 될 쌀·옥수수·밀가루는 왜 인도적 지원 품목이 될 수 없나. 이건 전례가 없는 사태다. 김영삼 정부 이래로 대북 인도적 지원의 알짬은 식량 지원이었다. 심지어 북한 붕괴론을 앞세워 대북 강경정책으로 일관해 인도적 지원에 인색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명박 정부도 북한에 쌀을 지원한 적이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땐 한해 30만~50만t의 식량을 지원했다.
하긴 이명박 정부도 2010년 천안함 침몰 사태 이후 인도적 지원 단체의 대북 쌀·옥수수 지원을 가로막았다. 나라 안팎에서 보편적 인권인 생명권을 외면하는 야만정권이라는 비난에 시달린 이유다. 그 이명박 정부도 밀가루 지원은 가로막지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지속 추진할 순수 인도적 지원’ 품목에서 쌀과 옥수수뿐만 아니라 밀가루도 배제한다. 그럼 콩기름은 어떨까? 설탕은 되는데 콩기름은 안 된단다. 갈수록 미궁인가? 이유가 궁금하면 단순무식해지면 된다. 박근혜 정부가 보기엔 혼자선 걷지도 제 한 몸 가누지도 못하는 아기만 ‘순수 인도적 지원’의 대상이다. 쌀·옥수수·밀가루는, 머리에 붉은 뿔이 달린 조선인민군이 빼앗아 먹을 수 있기에 안 된다. 콩기름은? 그건 인민군이 무기를 닦는 데 쓸 수 있어 안 된다.
박근혜식 정치에서 ‘총론 우등, 각론 낙제’의 모순은 새삼스런 게 아니다. 화려한 수사의 이미지와 실질 사이의 괴리가 아뜩하다. 쌀·옥수수·밀가루는 안 되고 분유만 되는 인도주의. 설탕은 되는데 콩기름은 안 되는 인도주의. 이게 사람이 사람한테 할 일인가.
이제훈 국제부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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