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30 18:50
수정 : 2014.04.3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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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 사회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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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하루 죽어간다. 비유법이 아니다. ‘창백한 푸른 별’의 식구로 태어나 죽어가며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 죽음은 삶의 다른 얼굴이다. 그러니 삶이 존귀해야 하는 것처럼, 죽음도 존귀해야 한다.
한국에서 죽음은 존귀하지 않다. 선장과 선원의 ‘1호 탈출’, 안전과 안보를 입에 달고 사는 박근혜 정부의 우왕좌왕 구조 실패로 생때같은 목숨을 잃은 안산 단원고 학생 등 세월호 승객들. 우리가 텔레비전 생중계를 보는 동안 그들이 서서히 죽어갔다. 그 ‘죽음의 방식’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한다.
다른 얼굴을 한 세월호 참사가 우리 옆에 있다. 한국에선 날마다 732명이 죽는다.(이하 2012년 기준, 통계청 자료) 이 가운데 39명이 ‘자살’이다. 교통사고 사망자 13명의 세배다. 공식 통계로만 산업재해 사망자가 6명이다. 은폐된 산재 사망자는 더 많다. 누군가한테 살해되는 이도 3명이다. 암(201명)·심장질환(72명)·뇌혈관질환(71명) 따위로 죽는 이까지 더하면, 한국의 죽음 가운데 자연사는 절반도 안 된다.
이 죽음의 숫자가 뜻하는 건 뭔가?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다. 자살은 10~30대 사망 원인 1위이자 40~50대 사망 원인 2위다. 무한 입시·취업·생존 경쟁이 숱한 생명을 ‘죽음의 맷돌’에 밀어넣은 결과다. 한국의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다. ‘산재 사망자’라는 건조한 개념 밑에는 철판에 깔려 죽고 추락해 죽고 불에 타죽은 누군가의 어미·아비·딸·아들이 있다. 그들의 다수가 하청 노동자다. 저임금과 위험한 노동조건에도 식구를 먹여살리려던 생명이 스러지면, 그들의 가족도 파괴된다. 사람의 목숨과 안전보다 돈을 앞세운 기업 논리 탓이다. 산재 사망률도 자살률처럼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1위다.
세월호 참사는 ‘임계사고’의 전형이다. 수많은 사고 원인이 켜켜이 쌓이다 맹골수도에서 임계치를 넘어섰다고 봐야 한다. 돈과 직결된 원인만 한두가지 짚어보자. 이명박 정부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빌미로 해운업체의 경영 부담을 줄여준다며 선령 제한을 완화했다. 덕분에 일본에서 18년을 운항해 폐선해야 할 나미노우에호가 ‘고철값’에 한국의 최대 규모 여객선 세월호로 둔갑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 25명 중 19명이 계약기간 1년 이하의 비정규직이다.
한국이 가난해서 그런 게 아니다. 10대 대기업(70개 상장 계열사)의 내부 유보금이 444조2000억원이다. 가계부채는 1000조원을 넘어섰다. 둘 다 사상 최대 규모다. 대기업은 배터지고, 가계는 배곯는다. 더 많은 이윤 추구가 창조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가깝다. 양극화라는 바이러스가 무한 증식하며 생명을 옥죈다. 돈을 좇는 기업과 관료·정치인의 비리·야합이 세상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이 웅변한다. 이 사업이 생명의 어머니인 강을 죽이고 숱한 노동자와 뭇 생명을 수장했다. 한국은 오래된 ‘비리 위험사회’다. 비리와 야합의 연쇄고리를 끊지 못하면 또 다른 세월호 참사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죽음이 존귀하지 않은데 삶이 어찌 두렵지 않겠나.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은 당연한 결과다.
그래도 넋 놓고 있진 말자. 죽음이 삶의 다른 얼굴이듯, 절망은 희망의 다른 얼굴이다. 겨울을 이겨낸 나목이 꽃을 피우듯, 우리의 삶도 비리와 야합의 지옥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그러니 서로 보듬으며 힘을 내자. 초기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을 읊조린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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