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25 18:29
수정 : 2014.06.2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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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 사회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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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평등한가? 현대 인류의 답은 이렇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세계인권선언 제1조)
하지만 사람들은 평등을 믿지 않는다. 부자/빈자, 정규직/비정규직, 장애인/비장애인, 남성/여성/성소수자…, 차별의 벽이 도처에 있다.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듯한 종교·인종·종족 갈등은 21세기 인류의 악성종양이다. 지적·신체적 차이와 불평등을 구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학교에선 자라나는 영혼을 점수로 줄 세운다. 보수는 ‘날 때부터 클래스가 다르다’고 하고, 진보는 ‘죽은 노동’(자본)이 ‘산 노동’을 압도한다고 전제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생명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압도적이고도 근본적인 동등성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생로병사의 4고(苦)를 설파한 석가모니를 되새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로선 ‘사람은 평등하다’는 현대 인류의 정신 지평에 가닿을 도리가 달리 없다.
한강의 신작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무시로 아뜩해져 힘겨웠다. 책장을 덮지도 넘기지도 못한 채 멈칫거린 순간이 많다. 19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에 남은 사람들, 특히 열여섯살 소년 ‘동호’의 죽음이 이야기의 발원지 구실을 한다. 그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에필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수상한 세월 탓이다. 진도 앞바다에 수장돼, 다른 세상의 별이 된 304명(11명은 아직 주검을 찾지 못했다)을 떠올린 것은. ‘전교조는 노조 아님’이라는 고용노동부, 그를 추인한 법원이 떠오른 것은. 1989년 결성 뒤 시인 도종환·안도현 등 교사 1527명을 파면·해임하고도 없애지 못했으며, 1999년 1월 합법화 뒤 한국 교육의 한 축을 맡아온, 6·4 교육감 선거에서 8명의 당선자를 배출한 교사조직을 다시 법 밖으로 내몰면 무엇이 좋아지나? 이틀에 한명이 넘는 초·중·고교생이 자살하는 교육 현실을, 무한 입시·취업·생존 경쟁이 숱한 생명을 ‘죽음의 맷돌’에 밀어넣는 참혹한 현실을,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바꿀 수 있나? 6만여 전교조 교사를 괴롭혀 사회갈등을 부추기는 거 말고 뭘 얻을 수 있나?
광주, 용산, 세월호, 핵발전소, 밀양, 강정, 전교조…. 저 무참한 현실의 연쇄는 ‘고통의 이름으로 사람은 평등하다’는 믿음을 뒤흔든다. 대통령 노릇 한번 해보겠다고 제 나라 국민한테 총질한 전두환, 생명의 어머니인 강을 돈벌이의 볼모로 삼아 뭇 생명을 유린한 이명박, 일이 잘못되면 남 탓을 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박근혜 대통령…. 그들에게도 ‘고통’이라는 게 있을까? 대피명령도 없이 ‘1호 탈출’한 세월호 선원과 제자들을 구하려 목숨을 던진 단원고 교사들(생존율 21%로 세월호 탑승 집단 중 가장 낮음)을 가르는 건 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그래서일 게다. 작가는 책에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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