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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10 19:19 수정 : 2014.08.10 21:22

권태호 정치부장

영화 <명량>이 관객 1000만명을 넘었다. 흔히 ‘관객 1000만명’은 사회현상으로 인식된다. <명량>이 1000만명을 넘어선 데는 김한민 감독이나 주연 최민식보다 ‘이순신 장군’의 공이 더 큰 것 같다. 사람들은 ‘이순신’을 갈구하는 것이다. 이순신에게 있고, 지금의 정치인, 특히 명량해전을 준비하기 전의 이순신처럼 백의종군 처지로 떨어진 새정치민주연합에 없는 게 뭔가?

자기희생. 언론이 어떨 때는 정치인에게 “권력의지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한편으론 무욕에 가까운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게 모순인 것 같기도 하다. 7·30 재보궐선거 다음날 손학규 새정치연합 고문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한겨레>는 2면에 ‘세대교체 신호탄 되나’라는 제목을 넣었다. 하지만 그 기사를 넘길 때 ‘그렇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맞다’ 판단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일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발의 ‘탄’도 더해지지 않았다. 합리적인 이유는 많다.

명량해전에 임하기 전 이순신은 장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살려고 마음먹지 말라.” 그는 “사즉생, 생즉사”(죽으려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 하지 않았다. 왜선 330척 앞에 외가닥 일자진 12척이니 우리 모두 어차피 살기 힘들다 본 것이다. 지금 새정치연합은 130척이다. ‘잘하면 살 수 있다’는 마음이 왜 아니 들겠는가?

민(民)을 위한 마음. 아무리 지질한 정치인일지라도 민심을 생각 않는 정치인은 잘 없다. 민심이 곧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심이란 도대체 뭔가? 7·30 다음날 <한겨레>는 ‘새정치연합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첫날 제목에 ‘민심 동떨어진 그들만의 정치’라고 썼다. 개인적으로 의구심이 일었다. “민심 동떨어진 것으로 치자면 새정치연합보다 새누리당이 훨씬 더하지 않은가?” “민심이란 게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70%로 올리고, 집값 올라가는 걸 바라는 건가?” “세월호 참사 그만 덮고 경제만 생각하자, 새정치연합이 그걸 못했다는 건가?”라는.

민심은 천심이라 할 때, 민심이란 하늘같이 어질고 정(正)하다기보단, 언제 맑았다 흐릴지 알 수 없는 변덕,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이 됐든 그 천심을 살피고 따르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쯤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새누리당은 확실히 새정치연합보다 촉수가 뛰어나다. 새정치연합은 이 점에서 늘 작은 승리에 곧잘 취한다. ‘새누리가 저 정도니 우리가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라고 할 때 늘 철퇴를 맞는다. 잠시도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민심은 늘 의(義)보단 이(利)에 가깝고, 그래서 민심은 새누리에 더 가깝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보면, 명량해전을 앞둔, 모순된 세상 앞에 놓인 이순신의 독백이 나온다. “이 방책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능력. 명량해전에 임하는 이순신에게 자기희생과 민을 위한 마음만 있었다면 장렬히 전사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은 몰살당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준비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 훈련했고, 적의 정세를 염탐했고, 둔전에 농사지어 군량을 확보했다. 취미는 활쏘기였다. 사람의 능력이란 때론 타고난 자질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일상의 자세가 좌우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갑옷을 입고 잠을 잤다.

오늘날 정치인에게 400여년 전 이순신이 되라 하는 건 무리한 당부일지 모른다. 그러나 <명량> 흥행에서 보듯 ‘민’은 “나는 이(利)를 위하더라도, 지도자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있음을 보여준다. 명량해전 있기 5년 전인 사천해전(1592)에서 이순신은 왼편 어깨에 총을 맞아 등이 뚫렸다. 그날 일기에 이순신은 이렇게 썼다.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권태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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