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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28 19:00 수정 : 2015.06.28 19:00

고통은 개별적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누군가의 골절보다 더 아프다. 각자 자기 몸을 갖고 살아가는 실존의 한계다. 1, 2, 3 …. 새 번호가 줄을 이어 182까지 왔다. 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MERS. 5월20일 이전에는 한국인 대부분이 그 존재조차 몰랐던 낯선 감염병, 중동호흡기증후군.

36번과 82번. 사람들은 이 번호를 아마도 이렇게 이해할 터. 36번째와 82번째 메르스 확진 환자. 여기서 번호는, 사람이다. 그러니 번호 너머로 가야 한다. 메르스는 36번과 82번을 묶어주는 끈이 아니다. 둘을 갈라 놓은 칼이다. 80대 노부부. 누군가의 일생보다 더 긴 세월 험한 세상을 함께 견뎌온 반려. 6월3일 남편이 먼저 숨을 멈추고, 보름 뒤 아내가 눈을 감았다. 3차 감염. 정부가 초기 대응에 신속했다면 지금도 손을 맞잡고 웃고 있을 노부부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부분)

무색무취한 번호 너머, 기쁨과 분노와 사랑과 눈물과 땀이 짙게 밴 “한 사람의 일생”을 느끼려는 노력, 곧 ‘고통의 개별성’을 넘어서려는 애씀이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 길에서 메르스가 드러낸, 우리가 사는 세상의 민낯을 직시해야 한다.

삼성서울병원: 한국 의료계를 쥐고 흔드는 ‘빅5’의 일원. 힘깨나 쓰거나 돈 좀 있다는 이들이 초상을 치를 때 문상객을 받는 장소로 가장 선호하는 병원. 그 병원에서 메르스 환자의 절반이 나왔다. 그런데 ‘의료계 군비경쟁’의 선두주자인 그 병원에는 메르스 환자를 치료할 음압병실이 없었다. 음압병실은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국립중앙의료원: 1958년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의 도움으로 건립된 한국 공공의료의 산증인. ‘낡은 시설’과 ‘질 낮은 의료진’과 ‘돈 먹는 하마’의 대명사라는 비난 속에 이명박 정부 때부터 돈을 벌라는 압박에 시달려온, 그러나 힘 있고 돈 있는 이들은 외면해온 천덕꾸러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음압병실을 갖춘 메르스 대처의 허브이자 중앙거점의료기관.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했던가. 효율의 상징 ‘빅5’는 힘을 쓰지 못하고, 비효율의 대명사로 비난받던 공공의료기관이 메르스 대처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의 공공병상 비율(12.8%)이 의료 영리화의 최첨단이라는 미국(24.9%)보다 낮다는 사실이 뜻하는 게 뭔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이 평균 77% 수준의 공공병상 비율을 유지하는 이유가 뭔지. 대통령은 왜 메르스 환자 발생 열흘이 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지. 대통령은 왜 국무회의 때마다 메르스보다 ‘부정부패와 적폐’,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관련 국회법 개정안, 북한의 ‘공포정치’, ‘메르스 유언비어’ 따위에 더 관심을 보이는지. 세월호 참사 뒤 시민의 안전을 지키겠다며 신설한 국민안전처의 장관이 뭘 믿고 “안전처는 감염병을 포함해 사회 재난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국회에서 태연하게 말했는지. 반세기 넘도록 전쟁이 없는데도 수십만의 젊은이를 강제 징집하고 돈 한푼 못 버는 군에 매년 수십조원의 국방비를 쓰면서도, 역병에 대처할 핵심 의료 인프라이자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지켜줄 최후의 방어선인 공공의료기관은 왜 돈이 안 된다며 폐원(진주의료원)하거나 돈을 벌라고 닦달하는지. 이런 질문의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으면, ‘고통의 개별성’을 넘을 길도, 더 나은 삶과 세상으로 가는 길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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