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4.20 20:25
수정 : 2016.04.20 20:25
“국내 최초의 국제영화제인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13일 오후 7시30분 부산시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극장에서 개막했다.”
1996년 9월14일치 <한겨레> 1면 기사를 다시 찾아 읽는다. 꼭 20년 전 문화부 막내 기자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첫걸음마를 떼는 현장을 취재했다. 영화제의 꿈을 이루려고 영화인들이 국내외를 뛰어다니며 분투한 사연들을 들었지만, 한국에서, 부산에서 정말로 국제영화제가 열릴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그날 레드카펫에 전세계 배우, 감독들이 모여들고, 밤 바닷가에 모여 앉은 영화팬들 앞 대형 스크린 위로 개막작 <비밀과 거짓말>이 펼쳐질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암흑의 시대를 겪어낸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한복판에 선 느낌이었다. 독재정권의 오랜 검열과 탄압을 뒤로하고,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게 되면서 실험적이고 용감하고 자유로운 영화들이 곳곳에서 꽃을 피웠다. 오랫동안 금지됐던 영화들을 실컷 보고 토론하는 모임들이 여기저기서 싹을 틔웠다. 봉준호, 박찬욱, 류승완, 홍상수, 김지운, 김기덕, 이창동, 허진호 등이 새로운 영화를 들고 관객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를 상징하는 부산영화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영화팬들과 부산시민의 열정에 전세계 영화인들이 반하는 유쾌한 축제로 성장했다.
20년 만에 문화 담당으로 되돌아온 요즘, 역사는 정말 후퇴하기도 하며, 한 사회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끌려갈 수도 있음을 실감한다.
올해 21회째를 맞는 부산영화제는 성년의 잔치는커녕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몰려 있다. 2014년 부산시가 세월호 참사를 그린 <다이빙벨>의 부산영화제 상영을 문제 삼으면서 시작된 정치 개입 갈등은 영화제 탄생과 20년 역사의 주역인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부산시가 사실상 쫓아내는 사태로 이어졌다. 영화인들은 이제 이용관 위원장 개인의 거취 문제를 넘어, 정부의 영화제에 대한 정치적 외압을 차단하고 독립성을 보장할 정관 개정을 해법으로 요구한다. 부산시는 시장이 영화제 조직위원장을 임명하는 쪽으로 정관 개정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가 부산영화제를 장악하려는 포석이라 보기 때문이다.
정부의 ‘부산영화제 죽이기’는 박근혜 정부 들어 끊이지 않은 ‘권력의 문화 습격 사건’의 상징과도 같다. ‘문화 융성’을 외치는 이 정부에서는 21세기 현실을 이탈해 1970년대 언저리로 되돌아간 듯한 문화계 인사와 지원에 대한 정치적 개입, 검열 논란이 계속됐다. 청와대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인사 개입 논란,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듯한 작품을 발표했던 연출가에 대한 창작지원사업 포기 종용,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연극 공연 방해 등이 이어졌고, 대통령이 관심을 보인 명품 전시회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경질됐다. 주민들이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벌여온 제주 강정마을에서 23일부터 열리는 강정국제평화영화제를 앞두고 서귀포예술의전당은 “정치성”을 이유로 대관 불가를 통보했다. 반면, 총선 직전 대통령이 참석한 문화융성위원회에 <태양의 후예> 한류 스타 송중기를 들러리 세우고, 대통령의 한마디로 이미 촬영을 마치고 모두 철거된 <태양의 후예> 세트장을 20억원 넘는 세금을 들여 다시 짓겠다는 ‘전시행정’은 떠들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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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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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간 부산국제영화제의 성장도,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도, 한류의 발전도 자유로운 창작과 비판적 시선 위에서 이뤄졌다. 정부가 예산 지원하고 명령할 테니 시민은 고분고분 가만히 따르라는 시대착오적 ‘문화융성’은 거부한다. ‘지금은 2016년이니까.’
박민희 문화·스포츠 에디터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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