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2.15 18:43
수정 : 2017.02.16 09:44
김의겸
선임기자
일본의 작은 어촌 다이지 앞바다. 배들이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유영하는 돌고래 떼를 가로막고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을 낸다. 청각이 예민한 돌고래는 허둥대다 움푹 들어간 만안으로 내몰린다. 한번 갇히면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다. 학살이 시작된다. 작은 배를 탄 어부들이 돌고래 떼 사이를 누비며 쇠작살로 내리찍고 갈고리를 휘두른다. 뿜어져나오는 피로 에메랄드빛 바다는 온통 검붉게 물든다. 바닷물이 끈적거려 보일 정도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이렇게 도륙되는 돌고래가 한 번에 수백 마리, 1년이면 수천 마리란다. 2009년 오스카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더 코브>의 장면이다.
13일 울산 고래생태체험관에서 죽은 돌고래는 다이지 앞바다 학살극의 생존자다. 어리다고 봐준 게 아니다. 수족관에 더 비싸게 팔아넘기기 위해 살려뒀을 뿐이다. 다이지의 어부들은 어리고 예쁜 돌고래를 골라서 어미 돌고래로부터 떼어 놓는다. 아기 돌고래는 어미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인간을 당해낼 수는 없다. 그러고는 남은 어미들을 향해 작살이 꽂히는 것이다. 울산 돌고래의 사인은 폐에 피가 고이는 ‘혈흉’ 때문이라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나중에 나오겠지만, 눈앞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는데 어찌 가슴에 피 응어리가 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고래에게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그 경이로움에 있을 것이다. 40억년에 이르는 생물체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일 가운데 하나로 고래의 출현을 꼽고 싶다. 인간과 고래를 포함한 모든 포유류의 먼 조상은 물고기다. 물고기가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버리고 고생고생해서 네발 달린 동물이 되었다. 그런데 고래는 그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귀환에는 엄청난 손실이 따른다. 마치 애써서 자동차를 만들어놓고는, 다 해체한 뒤 그 부품을 이용해 잠수함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타이어를 떼어내고 휠을 녹여 스크루로 만들고, 공기흡입구는 잠망경으로 개조한 셈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 잠수함을 만드는 게 훨씬 낫다. 그래도 고래는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완벽한 기능을 갖추었다.
우리로 하여금 동류의식마저 느끼게 하는 건 특히 뇌일 것이다. 포유류의 뇌에는 회색 막처럼 표면을 감싼 대뇌겉질이 있다. 더 똑똑해진다는 건 그 막의 면적을 넓히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을 포함한 유인원과는 막 전체에 쭈글쭈글 깊은 주름과 틈을 냈다. 그 뇌 주름면에서 인간과 대적할 만한 유일한 상대가 바로 고래다.
왜 고래만 특별대접을 받아야 하느냐는 불만이 나올 수 있다. 하긴 그렇다. 수천만 마리를 태연하게 질식사시켜 흙구덩이에 파묻어 버리는 닭을 생각하면 너무나 혼란스럽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란 게 일관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씩 웃는 돌고래, 슬픈 눈의 판다, 천진난만한 얼굴의 어린 바다표범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표정과 능력을 갖춘 녀석들은 그저 운이 좋은 녀석들이다.
그 특별한 종부터라도 우리 인간이 공감의 폭을 넓혀나갔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동물 보호 운동의 성서라고 불리는 <동물해방>의 저자 피터 싱어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인간에게 자신의 가까운 친족과 동맹을 중시 여기는 감정 이입 능력을 부여했는데, 차츰 그 대상이 넓어져 가족에서 마을, 부족, 국가로 확대됐다. 이윽고 감각있는 모든 생명들까지 포함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감정 이입 확대’의 여정을 떠나기에는 돌고래가 출발지로 제격인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넓어진 마음은 거꾸로 인간 사회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폭력을 배격하고 인류애를 확장시킬 게 분명하다.
kyummy@hani.co.kr
광고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