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2.21 18:39
수정 : 2018.02.21 19:09
박민희
국제 에디터
이방카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딸이 되기 훨씬 전인 2000년대 초반 출연한 영화가 있다. <본 리치>, ‘부자로 태어나’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제목인데, 존슨앤존슨 그룹의 상속자 제이미 존슨이 억만장자 상속자 친구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다.
이방카는 뉴욕 맨해튼 중심가가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68층 방 곳곳을 보여주면서, “나는 트럼프 일가의 일원이라는 것과 가문의 이름과 부모님이 이룬 모든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모델 일을 하러 오스트레일리아에 갔을 때의 일화를 꺼낸다. 한 남성이 자신에게 다가와 “부자로 사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 한번도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고 물었다며, “정말 당황스러웠다”고 말한다. 이유는? “그 사람이 그렇게 무지하다는 게 짜증났다.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다니. (…) 돈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있다니.”
훨씬 철없는 다른 상속자들에 비해 이방카는 상당히 절제되고 계산된 발언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리치>를 보면 이방카의 약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보통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구름 위의 사람이라는 것.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아버지 특권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
트럼프 백악관의 비화를 파헤쳐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책 <화염과 분노>를 보면 이방카는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 법안 통과, 미-중 정상회담, 일본 순방 등마다 이방카는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야심만만한 ‘퍼스트 도터’ 이방카가 평창겨울올림픽 폐막식에 미국 정부 대표단장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내일 한국에 온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돌던 한반도에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열린 화해와 대화의 문 앞에서, 이방카가 북-미 대화의 가교가 될 수 있을지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대화의 주요한 메신저가 될 수 있다면, ‘상속자’를 넘어서 의미 있는 여성 정치인으로 도약할 더없이 좋은 기회다.
한가지 더, 이방카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한국의 지엠(GM) 노동자들을 만나고, 트럼프의 부당한 보호무역 조처에 대한 한국의 여론을 전달해 동맹에 해를 입히고 있는 아버지의 통상압박 공세를 진정시킬 수 있다면 그의 역할이 훨씬 돋보일 것이다.
한국 내 일부 세력들은 미국의 보호무역 조처에 “당당하고 결연하게 대응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한-미 동맹을 흔드는 것처럼 비판하고 있지만, “이른바 동맹이지만 무역에 있어서는 동맹이 아니다”라며 동맹인 한국을 먼저 공격하고 나선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다.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층의 표심을 사기 위해 모든 조처를 동원할 기세다. 특히 무역전쟁의 상대라고 큰소리를 쳐왔지만 보복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중국이나 이웃나라 캐나다, 멕시코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동맹인 한국을 주요 목표물로 삼겠다는 계산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 정부가 “당당하고 결연하게” 대응하지 않을 경우 어떤 상황까지 몰리게 될지 우려스럽다. 다음달부터 시작되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도 트럼프 행정부가 주둔비용 전체인 연 2조원을 한국이 부담하라고 요구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트럼프의 보호무역 공세에 대해, 한국인들도 이방카에게 해줄 말이 있다. “당신 아버지가 그토록 막무가내라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힘만 있으면 약자에게 뭐든지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계 최강대국 지도자라니 당황스럽다”고.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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