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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23 18:26 수정 : 2018.12.24 13:29

박현
신문콘텐츠부문장

5~6년 전 미국에선 ‘코드커팅’(전선 잘라내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코드커팅은 유료 케이블방송을 보기 위해 티브이에 어지럽게 연결한 전선들을 잘라내고, 스트리밍 서비스(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나 인터넷티브이(IPTV)로 갈아타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를 주도한 대표적 기업이 넷플릭스다. 넷플릭스는 풍부한 콘텐츠(영화·드라마)와 저렴한 가입비에 힘입어 젊은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특파원 생활을 하던 내가 가입했던 케이블방송은 기본가입비만 대략 월 70달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에 프리미엄 서비스 몇개 추가하면 100달러를 훌쩍 넘기는 가격체계였다. 실시간 뉴스 모니터링을 해야 했던 나로선 코드커팅을 하지 못했는데, 특파원 생활을 마지막 몇개월 남겨두고 도대체 왜 이게 인기를 끌까 궁금해 가입했다. 만족도는 예상보다 높았다. 월 가입비는 7.9달러로 케이블방송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여기에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자체 제작 콘텐츠 등 볼거리도 풍부했다. 신생 기업이 통신 공룡 기업들의 아성을 무너뜨린 이유를 알 만했다.

넷플릭스는 미국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잘 드러내준다. 설립자인 리드 헤이스팅스는 풍부한 벤처 자금과 활발한 인수합병(M&A) 시장 등이 갖춰진 실리콘밸리 특유의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31살 때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해 이를 키운 뒤 팔아 큰돈을 벌었다. 이를 종잣돈 삼아 1997년 넷플릭스를 설립한 뒤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아 사업을 확장했다. 2007년부터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해 현재는 유료 가입자가 190개국 이상 1억3700만명에 이른다. ‘파괴적 혁신’ 이론을 제시한 경영학의 대가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도 넷플릭스를 대표적인 파괴적 혁신 사례로 꼽았다.

2015년 가을 귀국하면서 한국에선 어떤 신생 기업이 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현실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아직 맹아 단계였다. 대신 통신 대기업 3곳 주도의 인터넷티브이가 세를 불리고 있었다. 다시 3년이 지난 올해 말에는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엘지유플러스가 넷플릭스와 제휴를 통해 자사 인터넷티브이 가입자들에게 넷플릭스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국내 대기업의 인프라까지 활용하게 된 만큼 넷플릭스의 한국 시장 공습은 가속도가 붙어 우리의 미래 먹거리를 ‘파괴’할 수도 있을 거라는 불안감마저 든다.

이 사례를 길게 설명한 것은 재벌 중심의 한국 산업구조와 빈약한 벤처 생태계가 신산업에 대한 우리의 대응 역량을 크게 떨어뜨리는 현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그치지 않는다. 자율주행차와 공유경제,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산업 대부분에서 유사한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할 경우 외국의 공룡 기업에 국내 시장을 내주는 상황이 우려된다는 얘기다.

정부는 경제 패러다임을 대기업과 중소·벤처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더디다. 여기엔 여야 정치권의 책임 방기도 큰 몫을 하고 있다. 혁신성장을 하려면 시장에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작동하도록 개혁이 이뤄져야 하는데도 국회에 계류 중인 경제민주화 법안엔 눈길도 안 준다.

정부가 혁신성장에서 성과를 내려면 재벌개혁에 속도감을 내면서 더 과감한 중소·벤처 기업 육성책을 내놔야 한다. 신산업 분야는 혁신 역량을 키우는 방향으로 규제 개혁을 하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충분한 보상체계와 사회안전망 제공 등의 유인책을 제시해야 한다. 과단성 있게 결단을 내리고 이를 추진하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때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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