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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02 10:41 수정 : 2013.12.03 09:57

조영아 소설 <만년필> ⓒ전지은

조영아 소설 <1화>



윤기의 부고를 받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그의 만년필이었다. 재킷 주머니에 늘 단정히 꽂혀 있던 검은색 만년필이 행성처럼 밤새도록 내 주변을 맴돌았다. 종내는 내가 지구이거나 지구본인 듯한 착각이 들었고, 그가 죽은 건지 만년필이 죽은 건지 슬픔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아내와 한바탕 일을 치르고 샤워를 하려던 참이었다.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무심코 집어든 휴대폰에 윤기의 부고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발신 번호가 낯설었다. 메시지를 다시 살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윤기가 틀림없었다. 그 순간 만년필이 떠올랐다. 벗은 채로 연달아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다들 나처럼 윤기의 부고를 의심하고 있었다. 만년필 따위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윤기를 만나기 훨씬 더 전에 이미 그의 만년필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윤기가 죽었다는 것보다 그가 암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더 아연실색했다. 그렇게 숱하게 만나는 동안 한 번도 그런 이야기는커녕 그 비슷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혈색이 좀 안 좋은 것만 빼면 병색을 의심할 만한 낌새를 전혀 챌 수 없었다. 목소리는 한결같이 걸걸했고 떡 벌어진 어깨며 풍채도 여전했다. 막창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변함없었다. 나 또한 그의 잔에 얼마나 많은 소주를 들어부었던가. 그간 의아했던 그의 행적이 살아났다. 하지만 그게 그의 죽음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아차릴 수 없을뿐더러 딱히 그래 보이지도 않았다. 환락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그의 부고를 맞은 게 어쩐지 좀 미안할 따름이었다. 나는 무엇에 쫓기듯 이불 속으로 도로 기어들었다. 능숙하게 아내의 품을 파고들었다. 만년필이 우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아내가 먼 우주를 날아온 운석처럼 느껴졌다.




조영아(소설가)



조영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로 제11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푸른 이구아나를 찾습니다》, 《헌팅》, 소설집 《명왕성이 자일리톨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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