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12.03 09:53 수정 : 2013.12.06 09:49

조영아 소설 <2화>



윤기와 나는 대학 동기이면서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그가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재수를 하는 바람에 동기가 되었다.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이미 문예반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시를 읊고 다녔고 학교 대표로 나간 공모전에서 곧잘 상을 타왔다. 학과 공부도 잘한 그는 부모님의 뜻을 저버리지 못하고 이과를 지망했다. 한의과 대학에 입학했으나 도중하차하고, 이듬해 내가 있는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 들어왔다. 우리는 틈만 나면 술을 마시고 인생과 문학을 논했다. 그는 재학 시절 등단해 작가가 되었다. 나는 그보다 한참 늦게 문단에 나왔다. 학교 들어간 것만 빼고 그는 모든 게 나보다 빠르거나 나았다. 술은 둘이 같이 마시는데 나는 항상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언젠가부터 난 그의 뒤를 허덕허덕 쫓아가고 있었다. 간신히 따라잡았다 싶으면 한달음에 껑충 달아났다. 등단도 그랬고 교수 임용도 그랬다. 은근히 샘이 났다. 그렇다고 그가 얄밉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속이 깊어 상대방을 배려하고 위하는 데도 남달랐다. 영어 실력이 빼어났던 그는 재학 시절 틈틈이 번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번 돈은 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위해 썼다. 밥을 먹이고 책을 사주었다. 나는 내 입에 밥 밀어 넣기도 바쁜데, 그는 묵묵히 남의 밥을 챙겼다. 딱히 잘못을 하거나 허투루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난 모종의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만 아니라면 어느 모로 보나 난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누리고 있는 축에 속했다. 옹졸한 마음에 일부러 그를 피하기도 했다. 이를 알 리 없는 그가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쪽에서 잠잠하면 저쪽에서 두드렸고, 저쪽에서 조용하면 이쪽에서 기웃거리는 사이였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내 경쟁의 반열에서 슬며시 밀어버렸다. 엄밀히 따져 내가 자진해서 퇴장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내가 아무리 깔짝거려도 허허 웃고 마는, 그는 사람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친구였다.

윤기의 재킷 주머니에는 늘 만년필이 꽂혀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문예부 시절에도 그의 수중에 항상 만년필이 있었다. 어쩌다 친구들이 필통에 굴러다니는 그것을 만질라치면 기겁을 해서 빼앗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드러내놓고 자랑을 하지도 않았고, 자랑을 할 만한 고가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를 떠올리면 만년필이 따라오는 것을 봐서 아마 내 쪽에서 그것에 대해 어떤 심리적인 그 무엇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가 만년필을 글을 쓰는 도구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것에 상응하는 거였다. 필기도구로서의 만년필 그 자체에 탐욕이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의 만년필에 대한 나의 집착은 병적이었다. 그의 작품이 공모전에서 상을 받거나 수상작으로 거론이라도 될라치면 작품보다 먼저 만년필이 떠올랐다. 마치 부적처럼 지니고 있는 만년필의 영험한 기운을 입어서인 듯했다. 그게 아니고는 그의 작품이 뽑힐 이유가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내 것보다 못했다. 그 당시 나는 그까짓 만년필 한 자루쯤 살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구입할 의사가 없었다. 그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고, 미리부터 그에게 지고 들어가는 처사였다. 그래도 난 그의 만년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이런 거 꽂고 다닌다고 소설가 되냐?” 하며 그의 안주머니에 꽂혀 있는 만년필을 낚아채 술집 벽에다 대고 낙서를 했다. 하필이면 ‘좆’을 썼다.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나는 그의 표정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낙서를 이어갔다. 벽에는 얇은 벽지가 발려 있어서 술술 미끄러지듯 글씨가 써졌다. 입속의 검은 좆. 그년 젖통.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소서.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 당시 우리들에게는 삶의 윤활유 같은 것들을 나열해갔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다들 내가 쓰는 낙서를 들여다보며 키득거렸다. 누구도 그의 표정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오직 한 사람, 나는 낙서보다도 그의 표정을 더 살폈다. 아니, 즐겼다고 하는 편이 정확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어서 폭발하기만을 기다리며 장난을 이어갔다. 누구는 데모하다 억하고 죽고 누구는 소설이 안 써져서 열라게 그 짓 허구. 아 씨팔, 소설하고 그년하고 누가 더 섹시해? 당연 소설이 더 섹시하지. 처음 의도와 달리 낙서는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 구경하고 있던 동기들이 한마디씩 훈수를 두기 시작했고 나는 어느새 그것들을 받아 적고 있었다. 그날 벽 한 면을 다 메우고 만년필은 얌전히 그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끝내 폭발하지 않았고, 나는 사정을 바로 앞두고 절정에서 그만 내려오고 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후 그런 장난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작가가 된 지금도 그의 재킷 주머니에는 여전히 만년필이 꽂혀 있었다. 가끔 자기 책을 사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으로 사인을 해주곤 했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조영아의 <만년필>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