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아 소설 <9화>
“참 준석 씨 앞에서 별 얘기 다 한다. 알잖아. 우리 사이가 얼마나 유별났는지. 병이 그리 깊지 않았을 때이지 싶어. 물론 난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각방을 쓴 지 꽤 됐을 적이야. 어느 날 우연히 그이 방을 엿봤어. 저물녘 베란다에서 걷은 빨래를 품에 하나 가득 안고 그 사람 방문 앞을 지나치려는데 기분이 이상했어. 아무 소리도, 기척도 나지 않았는데 방문 저 안쪽이 궁금한 거야. 가만히 문을 밀었지. 문틈이 생겼어. 그이 뒷모습이 보였어. 바닥까지 흘러내린 추리닝 바지와 살집이 빠진 앙상한 다리, 그리고 출렁이던 셔츠 뒷자락. 나는 그가 울면서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 선하고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는 걸 그 출렁이는 뒷모습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지. 출렁이는 그 셔츠 뒷자락에서 가시가 다 빠져나간 짐승의 냄새가 났어. 달려들어 그 뒷자락을 와락 움켜쥐고 싶었어. 가만히 문을 닫고 그 방을 등지고 앉아 빨래를 개기 시작했어. 그가 즐겨 입는 푸른 셔츠의 주름을 손바닥으로 펴가며 네 귀퉁이를 맞추어 접었어. 저녁을 진즉에 먹지 않은 걸 후회하며 말이야.”
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다연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북을 치고 있었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아름드리 팽팽히 당겨진, 모진 시간에 길들어 더 이상 갈라지고 터지지 않는, 둥글고 환한 북의 심장을 둥둥 두드렸다. 나는 북소리의 여운이 사라질 때까지 송장처럼 앉아 있었다.
“준석 씨도 그이가 죽을힘을 다해 밀어내려고 한 게 나라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머뭇거리는 새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이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진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어. 그런데 그 빈자리를 보는 순간 이건 인재가 아니라 천재지변이었구나 하는 확신이 드는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으로서도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그 무엇이었다는 거지. 사람이 참 간사해. 어떻게 해서든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몰아가니.”
“그래서 그 무엇이 알고 싶은 거네?”
“준석 씨라면 뭔가 짚이는 데가 있을 거 같았어.”
말을 마친 그녀가 위스키를 마셨다. 급속도로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한 손으로 목덜미를 지그시 눌렀다. 북소리는 여운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도 만년필에 대해 묻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연이 건네준 유에스비를 노트북에 꽂고 창을 띄웠다. 미발표된 원고는 중편 한 편, 단편 세 편, 쓰다 만 거 다섯 편이었다. 그리고 일기 형식의 산문이 여러 편 있었고, 작품을 수정하는 데 써먹었을 법한 토막글들이 여럿 보였다. 이를테면 작품 중 어떤 장면을 여러 갈래로 다르게 써놓고는 그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작품으로 발표하고 나머지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둔 경우였다. 다 똑같군. 빙그레 미소가 샜다. 나도 이런 수법을 곧잘 썼다. 선택되지 못한 그 나머지를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 버릇도 같았다. 죽은 친구가 살아온 듯 반갑고 설렜다. 그와 소주잔을 마주하고 앉은 듯했다.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작품을 하나하나 읽어갔다. 대부분 처음 보는 내용들인데 그중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낯익은 대목의 글이 보였다. 지난해 발표하고 올봄에 수상작으로 거론되었지만 그가 수상을 거부해서 더 유명해진 작품의 한 대목이었다. 아마도 채택되지 못한 그것의 또 다른 버전인 듯싶었다. 원래 정사보다 야사가 더 흥미진진한 법.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