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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13 09:38 수정 : 2013.12.16 10:28

조영아 소설 <10화>



객차를 빠져나온 나는 사람들이 쏠리는 방향으로 휩쓸려갔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그건 덩어리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과 코를 틀어막고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모든 건 정지된다는 슬로건이라도 걸고 있듯이 다들 일사불란하게 덩어리에 합류했다. 나도 재빠르게 그 덩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발을 밟히고 정강이를 걷어챘다. 나 또한 누군가의 발을 밟고 정강이를 걷어찼다. 발소리 속에 흐느낌이 섞였다. 덩어리는 두 개의 계단을 지나 또 다른 계단으로 향했다. 승강장 천장까지 가득 들어찬 검은 연기가 역류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숨이 막혔다. 눈이 따갑고 살갗이 타들어 가듯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덩어리가 출렁출렁 요동쳤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비명이 새 나왔다. 스멀스멀 덩어리가 부서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이어지다가 잦아들었다. 잠깐만. 사람이 깔렸어. 야, 이 개새끼야. 어딜 밟고 가. 여보, 괜찮아? 이봐, 정신 차리라고. 나는 겉옷을 벗어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이제 덩어리는 완전히 박살났다.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오로지 그 한 문장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 생애를 통틀어 이렇게 다급하고 절실한 적이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뜨겁고 매캐한 기운이 등짝을 훅 훑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몸이 아니라 껍데기가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오른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올가미에 걸린 듯 견고하고 단단한 악력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봤다. 강유미. 교복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서 있는 곳보다 두 칸 정도 아래서 여고생이 내 오른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여고생과 눈이 마주쳤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살려주세요. 눈빛이 말했다. 나는 돌아 내려가 여고생을 부축했다. 여고생은 젖은 낙엽처럼 내게 들러붙었다. 그 무게는 젖은 소금 가마니였다. 도저히 발을 뗄 수 없었다. 게다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검은 연기가 무서운 기세로 몰려왔다. 점점 의식이 희미해졌다. 나는 여고생을 품에서 떼어놓고 재빨리 돌아섰다. 채 한 걸음도 옮겨놓기 전에 여고생이 바지 자락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잡힌 다리를 힘껏 내둘렀다. 그러면 그럴수록 악력이 세졌다. 그 순간 이상한 오기가 발동했다. 살아서 나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순전히 저 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여고생의 안위는 아예 의식 밖이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게 존재하지도 않은 듯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저 애를 데리고 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야. 둘이 죽느니 하나라도 살아야지. 희미한 내 의식은 오로지 거기에 매달렸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저 악력을 물리칠까 고민했다. 언젠가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코트 안쪽 호주머니에 꽂혀 있는 만년필을 꺼내 움켜쥐었다. 뒤돌아서서 만년필을 치켜들었다. 여고생의 손등을 힘껏 내리찍었다. 짧은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여고생은 더 악착같이 내 바지를 움켜쥐었다. 나는 다시 손을 치켜들고 내리꽂았다. 연달아 미친 듯이 내리쳤다. 바지 자락을 움켜쥔 손이 차츰 풀리더니 여고생 몸이 맥없이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계단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나는 연기 속에 만년필을 던지고 앞으로 나갔다. 계단을 한꺼번에 두세 개씩 성큼성큼 올라 그곳을 빠져나왔다.

지하 이 층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여고생 강유미 양은 함께 사는 할머니 병간호를 하고 뒤늦게 등교하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비공 오지호 씨도 부모님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밤을 새우고 사고 열차에 탑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내는 아예 눈물 바람이었다. 나는 밥숟가락을 놓고 일어났다. 아내가 저 속에서 살아 돌아온 나 때문에 우는 건지, 아니면 텔레비전 속 사연 때문에 우는 건지 궁금했다.

글을 다 읽고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비로소 마지막 퍼즐 조각 하나를 끼워 넣었다. 다연은 이것을 읽었을까. 읽었다면, 그러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진정 허수아비처럼 살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윤기가 죽을힘을 다해 밀어내려고 한 건 네가 아니야, 라고 말해준 다음…… 뭐라 하지.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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