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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16 10:17 수정 : 2013.12.26 10:29

황정은 소설 <아무도 아닌, 명실> ⓒ전지은



황정은 소설 <1화>



그리고 그녀는 노트가 한 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금요일 저녁이었을 것이다. 오후 어느 때 그녀는 잘 사용하지 않는 찬장을 열었고 무슨 생각으로 그걸 열었는지 잊은 채로 어둑한 선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놓인 자리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찻잔들엔 파란색과 녹색으로 데이지 무늬가 있었고 테두리의 금빛은 약간 바래 있었다. 그녀는 그중에서 가장 아껴가며 사용했으나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찻잔을 알아보았다. 아마도 그 순간쯤이었을 것이다. 노트가 한 권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새로 살 필요는 없었다. 실리의 노트가 이 집 안 어딘가에 몇 권쯤 남아 있을 테니까. 그녀는 다른 찻잔들보다 깊숙하게 놓인 찻잔을 보았고 받침 모서리를 잡아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찻잔이 받침 안에서 달캉, 소리를 냈고 그걸 듣는 순간 노트에 관한 생각은 말갛게 멀어졌다.

다시 금요일이 되었을 때 그녀는 노트를 다시 생각해냈고 이번엔 지체 없이 책장 앞으로 가서 마땅한 걸 찾기 시작했다. 책장 어디쯤에 사용하지 않은 노트를 모아두었는데 그게 어느 칸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의 집엔 수만 권의 책이 있었는데 그게 다 실리의 책이었다. 그녀의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실리가 생전에 책을 냈더라면 그녀의 책도 한 권이나 어쩌면 몇 권쯤은 있었을 것이다. 실리가 이름을 적어 선물했을 테니까. 아마도 그 책의 첫 페이지엔 명실아, 하고 적혔을 것이다. 다른 것 없이 명실아. 언제고 자신의 책을 낸다면 첫 번째 증정본엔 그렇게 적을 거라고 실리는 말하곤 했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말하지 않고, 명실아.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서서 책들의 등을 위쪽부터 찬찬히 살폈다. 바래고 묵은 책들이었다. 실리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책을 꽂아두었고 그걸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이따금 먼지를 털어낼 뿐 그녀는 수십 년째 실리의 책장엔 손을 대지 않았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그 책들은 실리가 배열해둔 대로 조용히 낡고 있었다. 인간 없는…… 불안의…… 말할 필요가…… 에 대하여…… 눈에 띄는 제목들이 더러 있었으나 그녀에게 필요한 책은 아니었다. 그녀가 찾는 책은 제목이 적히지 않은 책이었으니까. 다시금 생각이 희미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자주색 책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고 그게 자신이 찾는 책이라는 걸 알았다.




황정은(소설가)



황정은

1976년에 태어났다.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와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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