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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17 09:51 수정 : 2013.12.26 10:30

황정은 소설 <2화>



노트를 마련했으니 이제 만년필을.

그녀는 실리의 책상으로 다가가 첫 번째 서랍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납작한 가죽 필통에 만년필이 들어 있었고 그게 언제나 거기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끈으로 묶인 가죽 필통을 열 때 허둥댔다. 실리의 만년필이 거기 있었고 그녀는 만족스러워 그것을 손에 쥐었다. 종이에 글을 적을 때는 만년필로. 그건 그녀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실리의 생각이었다. 실리는 자주 그렇게 말하곤 했고 평생 두 자루의 만년필을 가졌는데 어쩌면 그녀가 모르는 만년필을 한 자루쯤 더 가졌는지도 몰랐다. 누가 알겠나. 그녀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누가 알겠나…… 그녀는 서랍에 든 잉크병을 쥐고 뚜껑을 비틀어보았다. 검푸른 가루가 떨어졌다. 잉크는 고체가 되어서 병을 뒤집어도 흐르지 않았다. 펜촉도 잉크를 머금은 채로 굳어 있었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만년필을 부엌으로 가져가서, 생전에 실리가 자주 했던 것처럼, 유리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 펜촉을 담갔다.

그녀는 현관에 잠시 서 있다가 집 밖으로 나섰다. 정오를 조금 넘긴 골목엔 그녀 말고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긴 벽을 따라 느릿느릿 걷다가 완만하게 비탈진 골목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을을 맞은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발에 밟혔다. 단풍잎이 바싹 말라 둥글게 말려 있었다. 이렇게 되다가 금방 눈이 내릴 것이다.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요즘은 잉크를 어디서 파나. 문구점에서 팔지 어디서 파나 이 사람아…… 스스로 문답하며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계절의 공기가 신선하게 폐를 부풀렸다. 싸늘하고 맑은 날이었다. 덧옷의 성긴 올 사이로 찬바람이 들었는데 햇볕은 따뜻해서 바람만 아니라면 어디 모퉁이에 앉아 있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햇볕을 쬐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할 뿐. 내가 어렸을 때는…… 하고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동네 모퉁이에 그렇게 앉아 있는 노인들을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눈도 부실 텐데 노인네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데 앉아 있는 걸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그 사람들은 너무 어두운 방에서 살았던 거지. 너무 조용한 방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신발에 들어간 돌을 털어냈다.

아무리 걸어도 잉크를 파는 곳이 없어 그녀는 계속 걸었고 걷고 보니 시장이었다. 둥근 지붕을 씌운 좁다란 시장이 이어졌고 장을 보려고 나온 사람들이 그 길을 오르내리며 시장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도 그들 틈에 섞여 천천히 걸으며 건어물과 생선과 정육과 과일을 두루두루 구경했다. 납작하게 구운 과자와 사탕을 파는 가게에서 그녀는 어렸을 때 명절에나 먹곤 했던 무지개 젤리를 발견했고 그걸 한 봉지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쪽에 겸손하게 서서 과자 가게 상인이 종이를 말아 뿔처럼 만든 뒤 거기에 젤리를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종이 뿔을 손에 쥐고 이따금 젤리를 꺼내 먹으며 계속 걸었다. 젓갈, 장, 기름, 떡, 피, 삼, 향, 비늘 냄새. 어전 앞을 지날 때 그녀는 할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그게 자기를 부르는 소리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우리 할머니 오랜만에 나오셨네. 번들거리는 앞치마를 입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녀가 다시 놀라서 나를 아세요? 나를…… 하고 묻자 그는 알지, 그럼 알지, 우리 할머니 오늘 전어 좀 가져가, 전어가 요즘 죽여주고, 구워도 맛있고 쪄도 맛있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맛, 전어야 전어,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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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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