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소설 <4화>
첫 단락을 쓰자.
그리고 그것은 실리에 관한 것이 될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뭐가 됐든, 실리에 관한 이야기. 그런데……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까. 실리를, 실리에 관한 것을…… 무엇으로 시작해야 좋을까.
시작은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은 어떨까. 어떻게 끝내는 것이 좋을까. 실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실리는…… 하지만 실리는 이야기를 좀처럼 끝내지 못했지…… 하고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실리는 아주 적은 분량을 아주 천천히 썼고 매일매일 전날에 쓴 것을 처음부터 짚어가며 다시 썼다. 덕분에 실리의 이야기들은 마지막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개는 언제까지고 시작을 반복하거나 매번 시작되는 이야기로 남았다. 본인은 그 점을 괴롭게 여겼지만 그녀는 그래도 좋았다. 실리의 문장, 실리의 골격을 닮은 문장이 매일 조금씩 달라지면서 이야기도 조금씩 달라지는 걸 지켜보는 게 좋았다. 실리는 자신의 원고를 그녀 말고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그 문장, 그 이야기들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그리고……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할 때 실리는 그녀를 앉혀두고 이렇고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바로 그런 이야기를 쓸 거라고 눈을 빛내며 말했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실리의 문장을 읽는 것만큼이나 실리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어떤 이야기들은 실리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야기가 되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퇴근하고 돌아온 실리가 책상에 작은 등을 켜두고 그 불빛을 향해 등을 구부리고 앉아 뭔가를 쓰던 모습을 생각했다. 그런데 한번은 실리가…… 그렇게 쓴 이야기들을 밖으로 던져버린 적이 있었지…… 창문 밖으로. 공영주차장과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창문으로. 그녀는 당장 그걸 주우러 내려가고 싶었지만 실리가…… 실리가 도깨비처럼 눈언저리를 붉힌 채 서 있었으므로 그런 실리를 지켜보느라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실과 부엌에 달린 커다란 창들이 밤새 바람에 덜컹거렸다. 힘든 밤이었어…… 나중에 몰래 내려가 보니 그 이야기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도록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도저히 주울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린 뒤라서 몇 장 남아 있지 않았다.
실리가 세상을 뜨고 나서 그녀는 그녀가 읽거나 들은 실리의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기록해보려고 했으나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파편들이었다. 문장이라기보다는 목소리였고 모으려고 할수록 멀어지고 흩어지는 메아리들이었다. 실리의 이야기들은 책이 되지 못했다. 그 대신이랄 것도 없었지만 실리가 사 모은 책들이 이 집에 남았고 그 책들이 이제 그녀의 등 뒤에 있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도 어느 선반에 어떤 책이, 어떤 색 표지에 어떤 이름이 적혀 있는지를 다 말할 수 있었다. 다 말할 수 있다고 그녀는 믿었다. 이따금 아니야 그보다는 훨씬 자주 그녀는 그 책들 앞에 서 있고는 했고 그 많은 책 가운데 실리의 책이 없다는 것을 골똘히 생각해보고는 했으니까. 수만 권의 책들. 유명하고 위대한 이름들. 그것들은 일각(一角)이었다. 일각에 불과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이 있었고 그중에 실리가 있었다. 실리가…… 그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 아래 잠긴 실리를 정말 본 듯했고 거기 갇힌 실리를 어쩌지 못해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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