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소설 <6화>
그녀는 의자 곁에 서서 방금 누군가 앉았다 일어난 것 같은 각도로 벌어진 의자, 그리고 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상과 의자의 각은 왼쪽으로 약간 열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여기 앉아 있던 누군가는 왼쪽으로 일어서서 나갔을 것이다. 그게 나였나. 그게 자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 광경을 낯설다고 여기며 그녀는 의자에 손을 올렸다. 의자에 앉아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그새 식어서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녀는 만년필을 쥐고 체온과 비슷해져서 이물감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것은 계속 쥐고 있어야 하는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리의 두 번째 만년필이었다.
첫 번째 만년필은 그녀가 실리의 이름을 새겨 선물했는데 실리는 그걸 바닷가에서 잃어버렸다. 여동생의 집이 있는 그 섬에서…… 거칠게 쪼개진 돌이 많은 해안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거기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만년필을 떨어뜨린 게. 해안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실리는 수첩에 꽂아둔 만년필이 없다며 울상을 했고 함께 되돌아가 여기저기를 살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아마도 돌 틈 어딘가에 떨어졌을 것이다. 잘 보이지도 않는 틈으로. 만년필은 지금쯤 삭아서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녹이 잔뜩 달라붙은 나뭇가지 같은 형태로나마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작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밤과 낮을 겪으면서. 파도와 바람에 서서히 깎이면서.
실리는 늘 다루곤 하는 사물에 특별한 애착을 품었고 종종 그런 사물들에 어떤 정서가 있다고 우겼다. 머리핀, 신발, 안경, 열쇠, 동전 지갑, 필기구…… 낯선 곳에 가면 쓰레기 한 점 버리는 것에도 신중했고 혹시나 그런 장소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기면 낯선 곳에서 그 물건이 무엇을 느낄지, 그래 정말 무엇을 느낄지, 그 조그만 사물이 난데없이 그 자리에 홀로 남아 얼마나 애가 타고 허탈할지, 그런 것을 다 속상해하고는 했다. 본인이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리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으므로 무언가를 혼자 남겨두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사람만이 아니고 사물도…… 사물에게도.
사물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을까. 사물에게도.
실리는 언젠가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새벽에 벌판에 당도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 관한 내용이었다.
누구를 기다려?
연인을.
왜 기다려?
거기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얼마나 기다려?
상당히 오래…… 라고 대답한 뒤 실리는 그건 괜찮아, 라고 덧붙였다.
마리코는 대부분 늦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은 기다리는 거야.
마리코?
그 사람이 기다리는 사람의 이름이 마리코……
그래.
그런데 그 사람은 이제 앉고 싶어. 앉고 싶다. 앉고 싶다고 생각하며 벌판에 서 있는 거야.
앉으면 되지.
그게 안 돼. 앉으면 말이야…… 앉으면 되지,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서 앉았는데 벌판 가득 풀이 자라서 그 속에 앉으면 길게 자란 풀에 묻히는 거야. 마리코가 자칫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갈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서서 기다려. 서서 지평선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벌판이 흔들리겠지. 풍성하게 자란 풀과 풀이 서로 닿아 소리를 내고 바람의 방향으로…… 물결처럼…… 그 사람은 생각해. 마리코는 어느 방향에서 올까. 조금씩 방향을 바꿔 서며 지평선을 바라보는 거야. 그런데 이 벌판에 온전히 혼자인 것은 아니라서……
누가 있어?
누가 있지. 책상과 의자가.
책상과 의자를 무엇 아니고 누구인 것처럼 실리는 말했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리는 그런 이야기를 쓰겠다고 말했고 그녀는 밤에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바람이 불고 천장이 검게 일렁이는 것 같았지…… 벌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과 책상과 의자. 그건 꼭…… 죽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같다고 그녀가 말하자 실리는 그런가, 라고 대답했다.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 실리는 그걸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를 언제까지고 벌판에 내버려둔 채로 죽고 말았다. 실리의 화자는 내내 벌판에 있는 것이다. 마리코가……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갈까 봐 앉지도 못하고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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