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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4 10:33 수정 : 2013.12.26 10:31

황정은 소설 <7화>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 너와 내가 죽은 뒤에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위안이 되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죽어서, 실리를 만날 것이다. 실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실리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어떤 것, 어떤 상태로든 남아 있을 테고 내가 죽은 뒤, 실리와 나는 서로 간에 그런 상태로, 그런 상태로라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세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세계에 실리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상상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그러나 없다.

없다.

점차로 없고 점차로 사라져가는 것이 있다. 그뿐이다.

그녀는 실리의 사진을 여러 장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사진은 실리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스무 살 이후의 사진이었다. 실리는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있었다. 회전목마를 바라보고 있는 실리, 검은 바위에 앉아 있는 실리, 물이 빠져나간 해변에서 야트막한 물에 갇힌 치어를 들여다보고 있는 실리, 깜짝 놀란 듯 뒤를 돌아보고 있는 실리, 카메라 렌즈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실리, 그녀는 그 사진들을 종이 뚜껑이 달린 상자에 넣어두었고 최근 십여 년 동안 그 상자를 열어본 적이 없었다. 열어볼 이유가 없었다. 사진들, 그건 그냥 밋밋한 종잇장이었다. 그렇게 되는 순간이 왔다. 처음에…… 처음엔 그 모든 사진들 속에 실리가 있었다. 어떤 사진은 특별한 뭔가가 깃든 것처럼 생전의 실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죽음이라는 무지막지한 충격을 받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실리의 부스러기가 그 사진으로 깃든 것처럼. 실리의 눈이었고 실리의 코였고 실리의 이마, 실리의 입이었다. 그녀가 사진을 통해 실리를 보듯 실리도 사진 속에서 그녀를 보았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졌다. 사라졌고 거기 실리는 없었다. 눈의 형상, 코의 형상, 이마라는 형상, 입의 형상…… 그렇게 모이고 번진 잉크의 흔적일 뿐, 사진 속 인물이 실리라는 걸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 왔다. 실리가 이제 없다는 것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사진을 모아 상자에 넣고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이제 기억뿐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억. 가지고 있다고 믿는 기억.

그러나 이것들은 다 없어진다. 나와 더불어서. 나의 죽음과 더불어 조만간, 아마도 곧…… 아무도 실리를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고 실리는 영원히 잠길 것이다. 망각으로.

실리는 마침내 죽는 것이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그것을 상상해보았다. 그게 어떨지 생각을 해보았다. 어둠이었다. 모든 것을 지우는 어둠.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버리는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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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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