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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6 10:28 수정 : 2014.01.02 10:30

황정은 소설 <8화>



실리는 죽을 때 어땠을까.

그런 어둠을 보았을까.

그런 어둠.

나를 걱정했을까.

나를 남겨두고 가는 것을.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고 잎이 절반쯤 떨어져 나간 상수리나무 아래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아래로 운동화를 신은 두 발이 보였고 그다음엔 검은 바지를 입은 다리, 자주색 점퍼, 검은 머플러, 추운 듯 턱을 머플러에 묻은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그 얼굴을 왠지 아는 것 같았고 그 사람을 부르려고 벌떡 일어났다가 그만두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실리는 오래전에 죽었다. 본래도 폐가 좋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결핵을 앓았고 그 뒤로 줄곧 폐가 굳어가는 병을 앓았다. 실리가 숨을 들이쉬면 가슴에서 소리가 났다. 뭉치고 굳은 조직이 구겨지는 소리, 끝없이 들이쉬어도 모자랄 것 같은 소리…… 실리는 이따금 화장실이나 베란다 같은 곳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 혼자 숨을 몰아쉬고는 했다. 평생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가슴을 졸이다가 너무 이르게 늙어버린 실리의 어머니는 그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실리의 어머니도 죽었다. 그녀는 그것을 아주 이상하다고 여기며 한 번 더 생각해보았다. 실리도 죽고 실리의 어머니도 죽었다. 나는 남았다. 얼마나 됐나. 얼마나 오래 남아 있었나.

그녀는 실리의 책들과 더불어 이 집에 남아 있었다. 수만 권의 책, 그걸 담은 선반. 그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그게 그녀의 등 뒤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매 순간 그 소리를 들었다. 흡족하게 그 소리를 들었다. 실리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그 책들 앞에 서서 그 이름들을, 그 이름들이 새겨진 책들을 골똘하게 노려보았다. 그게 실리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이까짓 것들. 엄청난 활자들, 이야기들, 실리의 이름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도 없는, 아우성들. 실리는 그걸 읽으려고 자주 밤을 새웠고 그러고 나면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느 때 그녀는 실리가 그 책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 장 한 장 실리가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책장에서 날아오르는 각질들, 실리의 숨을 틀어막는 먼지들, 그런 것을 뿜어내며 형편없이 낡아가는 사물들. 그녀는 그 책들 위로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성냥을 던지고 싶었다. 그 이야기들에 이르는 이야기를 쓰지 못해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실리는 또 어땠나. 그까짓 것, 그까짓 것들이 실리를 죽였다.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어느 것도 펼쳐보지 않았다. 펼쳐보는 이 없으면 속수무책인 책들. 한 권도 버리지 않고 그 책들을, 그 책상을…… 닥치게 만들었고 죽게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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