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소설 <9화>
해가 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첫 단락을 시작하지 못한 채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한번은…… 실리를 데리고 여동생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밤배를 타고 갔다. 하필이면 배를 타고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실리였다. 별을 보고 싶다고 했다. 별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았다. 하늘은 두꺼웠고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배는 막막한 어둠을 미끄러져 나아갔다. 실리와 그녀는 선실에 있던 낡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갑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직 여름이었으나 바람이 찼다. 녹슨 난간 너머는 벼랑이었고 아래쪽에 잿빛 바다가 있었다. 물에 잠긴 스크루가 만들어내는 거품이 뒤쪽으로 흘러갔다. 실리는 마스크를 벗었고 그게 숨쉬기에 훨씬 좋다고 말했다. 몇 번인가 가슴을 부풀려 숨을 쉬었는데 배의 엔진 소리와 바람 때문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담요 속에서 실리의 손을 잡았다. 언제나 차가운 실리의 손. 언제나 뜨거운 그녀의 손. 이윽고 실리는 편안하게 등을 구부리고 섰다. 육지를 떠난 고깃배들이 먼바다에서 집어등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이 언제까지고 이어졌다. 그녀는 전에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질리지도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드는 것이 그 불빛들이었다. 그게 없었다면 다만 어둠일 뿐인 공간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것. 그녀는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압도적인 공간에 내던져진 인간에게…… 그것은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실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녀는 실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그 이야기의 화자라면…… 나는…… 새벽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 벌판에. 저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벌판에 한참 서 있었다. 마리코를 기다렸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 상당히 오래 기다렸는데 그것은 괜찮다. 마리코는 대부분 늦으니까.
다만 앉고 싶다.
앉으면 되지.
앉으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잠시 앉았으나 일어났다. 벌판 가득 풀이 자랐다. 그 속에 앉으면 길게 자란 풀에 묻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리코가 자칫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갈지 몰랐다.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벌판이 소소하게 흔들렸다. 풍성하게 자란 풀과 풀이 서로 닿아 소리를 내고 바람의 방향으로 마른 물결이 번졌다. 마리코는 어느 방향에서 올까. 조금씩 방향을 바꿔 서며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벌판에 혼자인 것은 아니다. 책상과 의자. 그게 있다. 나처럼 절반쯤 풀에 묻힌 채로 놓여 있다. 이 책상과 의자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한낮엔 햇볕에 노출되고 한밤엔 이슬에 노출될 테니까.
조금만 앉아 있자.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앉아서 마리코를…… 실리를 기다렸다.
이렇게 앉아서 몇 번의 겨울을 더 맞게 될까. 몇 번의 봄과 몇 번의 여름을. 그녀는 생각했다. 죽은 뒤에도 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난처한 상상인가.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노트에 만년필을 대고 잉크가 흐르기를 기다렸다. 제목을 적고 쉼표를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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