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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30 10:14 수정 : 2014.01.02 10:31

박정애 소설 <미인> ⓒ이현경



박정애 소설 <1화>



을사년(현종 6년, 1665), 이천(伊川) 도드람산, 돼지굴

인조의 손자, 인평대군의 둘째 아들, 금상(今上)의 사촌인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楠)이 돼지굴 앞 반석에 마련된 수달피 방석에 앉아 있다. 흰 피부와 선이 고운 콧날, 붉은 입술은 풀솜에 싸여 자란 뭇 귀인들의 범상한 관상이다. 그러나 범의 눈썹, 길게 찢어져 살짝 치켜 올라간 눈초리, 뚜렷이 긴 인중은 이 사람만의 범상치 않은 관상이다. 남의 왼쪽 뺨 가운데가 제풀에 경련하다 가라앉는다.

암벽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없는데다 암벽 너머 희끄무레한 하늘이 천막처럼 낮게 드리워 있는 이곳 돼지굴은 심지어 아늑하기까지 하다. 세속과 이곳은 이승과 저승만치나 아득히 단절되어 있는 듯하다.

허견(許堅)이 방금 숨이 끊어진 멧돼지의 생피를 뽑아 소주에 섞는다. 처남인 이천 둔감(屯監) 강만송(姜萬松)이 견을 돕는다. 견의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저 순결한 땀방울. 핥아 먹은들 냄새가 날까 보냐.

복선군은 이팔청춘 귀동자 견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이윽히 바라본다. 남인의 영수, 우의정 허적을 닮기는 했으되 그보다 훨씬 날렵하고 우아한 골격이 흰 눈 위에 잿빛 그림자로 서성거린다.

일을 마친 견과 만송이 남의 발치 눈밭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남은, 핏물이 소주에 고루 섞이기를 기다린다. 백자 술잔에 담긴 액체의 고운 붉은빛이 세 사내의 눈동자에 어린다.

남이 먼저 한 모금 마시고 견에게 잔을 돌린다. 견이 두 손을 정수리 위로 올려 잔을 받들어서는 고개를 외로 꼬고 한 모금을 마신다. 금귀고리를 단 견의 귀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어미를 탁하여 사내의 귀답지 않게 예쁘장하다. 견의 길고 숱진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견이 되돌린 잔을, 남이 다시 만송에게 내린다. 만송이 단숨에 잔을 비운다.

남이 입을 연다.

“이로써 우리 세 사람의 의리를 뭇 생명의 근원인 피에 부치노니, 목숨 다하는 날까지 굳건할지라.”

남의 뺨이 또 경련을 일으킨다.

만송이 입꼬리에서 흐르는 술을 소맷자락으로 훔쳐낸다.

천하를 다스리는 꿈을 꾸면서, 제 뺨 한쪽을 다스리지 못하는군.

행여 속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만송이 이를 앙다문다.

“오래 사모해온 미인(美人)께서 천하고 외로운 자를 꺼리지 않으시니 은혜에 감읍하옵니다. 소인들은 서얼을 천대하는 이 세상이 두렵고 싫사와, 그저 하늘땅이 들러붙어 인간이란 종자가 결딴나는 날만을 기다렸사온데, 이제 의탁할 미인이 있고 보니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하옵니다.”

견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린다.

남은, 지나치게 감격하는 소년이 사랑스럽다. 인정에 굶주린 소년은 젖배 곯은 유아와 같으니, 유아가 젖 냄새에 환장하듯, 젊은 견은 자기를 인정하는 이에게 진심을 바친다. 소년의 눈물방울이 첫새벽의 이슬이라면, 이해득실을 따지기 바쁜 늙은이의 노회한 눈동자는 잠들기 전에 뱉어내는 타액이다.

남이 사슴 육포 한 조각을 뜯어 입에 넣는다.

“아마도 내년 병오년에는 외가에 경사가 여러 번 있을 걸세. 때를 보아 노직(魯直, 허견의 자), 자네를 부를 터이니 그리 알게. 우리 남인 중에서 재주 있고 창창하다는 말 듣는 젊은 축은 그날 다 모일 걸세. 그들과 안면 틀 기회로는 맞춤한 자리지.”

“승지 영감이 영전하실 모양이옵니다? 아니면, 병신년에 중시가 있었고 내년이 꼭 십 년 되는 해이니 수촌(水邨, 오시수의 호) 나리께서 중시(重試)를 보시옵니까?”

“외숙들 중에서는 승지 영감이 제일 심약해. 크게 쓰이지는 못할 걸세. 허나 수촌은 인물이지. 재주를 타고난 데에다 위인이 담대하거든. 부전자전이라고들 하지만 승지 영감과 수촌을 보면 아들이 어느 모로 봐도 걸출하지. 병신년 별시로 급제한 무리 중에서 군계일학 격으로 커왔으니 이번 중시에는 장원을 할 걸세. 단번에 당상관으로 뛰어오르는 거지.”




박정애(소설가)
박정애

1970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장편소설 《물의 말》로 2001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에덴의 서쪽》, 《춤에 부치는 노래》, 《죽죽선녀를 만나다》, 《강빈,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여인》 등이 있으며, 청소년 소설로 《환절기》, 《다섯 장의 다이어리》, 《괴물 선이》, 동화책으로 《친구가 필요해》, 《똥땅 나라에서 온 친구》, 《사과는 맛있어》 등이 있다. 강원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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