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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31 10:20 수정 : 2014.01.02 10:31

박정애 소설 <2화>



당상관? 그렇지, 당상관. 그야말로 떼어놓은 당상이렷다.

견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생살을 도려내는 듯이 날카로운 통증이 견의 몸통을 훑어 내리고는 발가락 마디마다 고인다.

문장 다루는 재주라면, 담대하고 활달한 기상이라면, 견도 시수에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천얼(賤孼)인 견에게는 그런 재주와 기상을 발산할 통로가 없다. 오히려 그 재주와 기상이 가문의 걱정거리다. 서인들은, 종종 나라의 걱정거리라고까지 입방아를 찧어댄다. 천첩인 어미는 어릴 때부터 견이 무엇을 특출하게 잘하면 칭찬해주기는커녕 그 자리에 퍼더버리고 앉아 방성통곡하기 일쑤였다. 재상인 아비는 견에게 재주와 기상을 억누르고 색욕과 물욕을 추구하라 길을 터주었다. 아들이 글을 읽으면 근심했고, 무예를 닦으면 꾸짖었다. 기방을 드나들면 안심했고, 귀한 물건을 탐내면 반드시 구해다 주었다.

아비를 만나러 온 길에 견과 마주친 남은 처음부터 견을 각별히 대하였고, 견은 그것이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아비의 권세 때문에 집 주위를 얼쩡거리는 양반가 적자들이 견에게도 알랑방귀를 뀌어댔지만, 그들의 눈빛에 배어 있는 경멸을 눈치 못 챌 견이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알기에 견은 부러 그들의 아첨을 받아주는 체하다가는 심한 모욕을 주었다. 장안에 퍼져 있는 견의 악명은 실로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다. 사람이 하류(下流)에 처하면 온갖 악명이 모인다더니 한번 욕을 얻기 시작하자 짓지도 않은 죄까지 장안의 죄란 죄는 죄다 견에게로 몰리는 형국이다.

견의 마음을 읽은 듯 연민이 가득한 낯빛으로 남이 말한다.

“피에 부친 의리가 아닌가. 심중에 있는 말을 내어놓게. 내 다 들어줄 터이니.”

견이 고개를 조아린다. 뜨거운 눈물이 견의 무릎을 적신다.

“헤아려주시는 은혜에 감읍하옵니다. 외람되오나 은혜에 기대어 소인의 한 맺힌 심중소회를 말씀 올리겠나이다.

사람으로 나서 성장한다는 것은 물이 흐르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생각되옵니다. 흐르는 물을 막으면 고여 썩을 수밖에 없사옵지요. 지금 소인의 처지가 바로 고여 썩어 들어가는 물과 같사옵니다. 소인은 썩어 들어가는 물에서 소리도 못 내고 울부짖는 물짐승과 다름없사옵니다. 어미만 알고 아비는 모르는 것은 짐승이라고 저 《의례(儀禮)》의 전(傳)에도 나와 있는 줄로 아옵니다. 그런데, 소인과 만송 같은 얼자(孽子)는 오로지 어미만 알고 골육을 물려주신 아비는 남처럼 여기어야 하오니 과시 짐승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리까?

불행히도 집안에 적자가 없어 소인이 가친의 한 점 혈육임은 대감께서도 이미 잘 아시는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혈육이면서 또한 혈육이 아닌 듯 처신해야 하는 얼자인 소인은 감히 조상을 잇지 못하고 아비를 잇지 못하옵지요. 또한 서얼 금고법으로 하여 아무리 힘써 재주를 연마하여도 필경 그 뜻을 펼칠 수가 없사오니, 이것이 소인의 대로 끝난다면 다행이려니와 한번 얼자는 영구한 얼자로서 대대로 막히고 버림받사옵니다. 사람이면서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고 죄인이 아니면서 죄인처럼 움츠리고 살아야 하옵지요.

사정이 이러한지라 얼자가 철이 든다는 것은 곧 스스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임을 깨닫고 죄인처럼 숨어 사는 일이 되옵니다. 하오나 소인은 철이 들지 못하여 늘 잠든 채로 죽어 아무것도 모르게 되는 날을 꿈꿔왔사옵고, 또한 이러한 모순을 바로잡아주실 성인을 꿈꿔…….”

“이 사람, 노직.”

남이 손을 들어 견의 말을 가로막는다. 견이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든다. 남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견은 곧바로 이마를 땅에 찧을 듯이 엎드린다.

남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얼결에 깨물린 혓바닥에서 비어져 나온 제 핏물이 사슴 고기의 질긴 육질에 스며든다.

몹시 불안해진 견이 선수를 뗀다.

“천얼이 감히 방정맞은 입을 놀렸사옵니다. 죽여주소서.”

덜 씹은 육포를 꿀꺽 삼킨 남이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들의 가긍한 정상을 내 어찌 공감하지 못하리? 현철하오신 우리 금상이야말로 만고에 없는 성인이시니 머지않아 서류(庶類)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터. 그날을 기다리시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의 회갈색 눈동자는 암벽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견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남이 눈 더미 위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쓴다. 견이 입속으로 그것을 읽는다.

鳥聽. 새가 듣는다.

무슨 글자인가 싶어, 만송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간다. 그때,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고, 굳은 눈덩이가 떨어지며 부서진다. 세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연이어 무언가가 눈 위에 부딪는 둔중한 소리가 난다. 흰 눈 위에 선홍빛 길을 내며 핏물이 만송의 발치까지 흘러온다.

견은 몸서리를 친다. 두려움과 역겨움을 이기지 못한 그가 방금 호기롭게 마신 멧돼지 피를 게워낸다.

눈구멍이 동굴처럼 쑥 들어간 탓에 눈빛이 섬뜩한 더벅머리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복선군을 그림자처럼 쫓으며 경호하는 오목눈이다.

“웬 쥐새끼가 엿듣고 있기에 후환을 없애고자 목을 베었사옵니다. 돝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악산이옵니다. 성난 멧돼지들이 뒤처리는 알아서 해줄 터이니 과히 심려 마시옵소서.”

남이 짐짓 평정을 가장한 음성으로 나직이 말한다.

“지나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엿들은 일개 사냥꾼일 수도 있으나, 만에 하나, 부원군의 간자(間者)일 수도 있지. 노직, 조심하게. 도처에 저들의 간자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금상은 옥후 미령하시고 세자는 겨우 다섯 살이네. 장성한 종실(宗室) 중에서 나, 복선군은 부원군의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네. 형님과 아우는 여색에 빠져 늘 몽롱한 모양새라 저들의 멸시를 받을 뿐이지만, 여색을 기피하고 여러 벗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어디를 가든 감시의 눈이 따라붙지. 철저히 겉과 속을 달리하는 처세만이 우리 목숨을 보전해줄 걸세. 노직 자네는 그 울컥 토해내곤 하는 격정이 큰 병통일세. 때가 이를 때까지는 누르고 또 눌러야 하리.”

“대감의 말씀, 소인의 뼈에 아로새기겠나이다.”

견은 어리고 미거한 자신을 깍듯이 한 동아리로 대우해주는 남이 고맙다. 견의 뺨은 다시금 뜨거운 눈물로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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