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애 소설 <3화>
경술년(현종 11년, 1670), 평산 멸악산, 허견의 산채
견은 목검을 짚고 바위 위에 올라선다. 구슬땀을 흘리며 검술 훈련에 열중하는 만송의 무리가 내려다보인다.
견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사병들 모두가 그의 지체이거나 적어도 형제인 것 같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만송이 해서(海西)에서 끌어모은 스무 살 안팎의 이 젊은이들은 모두 지독히 가난하고 차별받는 천민 출신이다. 무당이나 광대나 갖바치나 갈보나 땡추 소생인 그들은, 자기네를 사람대접하는 견을 가슴에 품은 미인처럼 우러러 받든다. 견은 그들 각자의 집에다 해포쯤 놀고먹어도 끄떡없을 분량의 쌀과 피륙을 나눠주었다.
속눈썹 그늘진 견의 눈동자에는 뿌듯한 기운이 운무처럼 서려 있다. 견은 사흘째 이 험한 멸악산 산채에서 사병들과 숙식을 함께하면서도 피곤한 줄을 모른다. 첫날 접질리고는 퉁퉁 부어올라 움직이지 못하는 발목도 아픈 줄을 모른다. 밤마다 말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는데도 숙취가 없다. 여자 생각도 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저 울울창창한 나무들 위를 성큼성큼 걸어 단숨에 도성 문을 넘어설 것 같다. 세상을 뒤엎고 임금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새 임금에게서 병조판서를 제수받고도 정중히 사양하고, 율도국을 세우러 떠나는 당당한 영웅의 모습이 가슴 벅차게 떠오른다.
유년 시절 내내 그를 사로잡았던 축지법과 둔갑술, 분신술이 다시금 뜨거운 갈망으로 되살아난다. 그의 경전은 고금에 다시없을 역도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이다. 나라와 아비가 엄금하는 불온서적이지만, 나라와 아비를 증오하는 그에게는 성스러운 책이다. 그는 허균이 양천 허씨 한성바지로 하늘 아래 가장 서러운 얼자인 견, 바로 저를 위하여 《홍길동전》을 썼다고 믿는다.
첫 아내 강씨와 사별한 그가 수많은 명문가의 서녀들을 마다하고 무관 아비마저 죽고 없는 홍예형을 재취한 것도 다만 그녀가 홍씨라는 까닭에서였다. 허씨로서 홍길동의 현신인 자기에게 홍씨 성의 아내는 그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배필이라 여겨졌다. 물론 지금은 후회막급이다. 여인치고는 드물게 억세고 괄괄한 성정의 예형은 시부모를 이겨 먹는 것은 물론이요, 견에게도 눈만 마주치면 암상을 부린다. 그 아비 전(前)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홍순민이 천적(賤籍)에서 지워주지 않은 첩의 소생으로 그녀 또한 종의 명부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숙(妻叔) 홍양민은 감쪽같이 속였더랬다. 영의정 집 떡고물이나 얻어먹을까 기웃거리는 처숙이야 일찌감치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한 몸으로 교서관 정자(正字)의 재취 자리를 꿰차고도 쥐 죽은 듯 엎드리기는커녕 견이 소리를 지르면 더 큰소리를 내고 견이 때리면 살쾡이처럼 변하여 마구잡이로 할퀴고 물어뜯는 계집을 어이할 것인가. 시집온 지 햇수로 사 년이 흘렀는데도 포태(胞胎) 한 번을 못 한 돌계집 주제에 감히 서방 오입질을 나무라는 배짱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딸 하나 낳고 아들 못 낳은 죄로 지레 굽죄던 전처의 행신과는 과시 천양지차다. 물건이라야 내버리기도 쉬울 텐데, 어찌 됐건 육례를 갖춰 맞아들인 계집을 내쫓으려니 걸리는 게 많다. 안 그래도 재상집 서자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세간에 찧고 까불 건수를 손수 만들어 던져주는 꼴이 될 게 뻔하다. 집안에서도 그래서들 빼도 박도 못하고 쉬쉬하니, 계집은 날이 갈수록 더 기가 살아 설쳐댄다. 온 세상이 굽실거리는 재상 시아버지 앞에서도 겁 없이 나대는 꼬락서니라니.
견이 미간을 찡그린다.
에이, 칠푼이 같은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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