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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06 09:34 수정 : 2014.01.07 16:47

박정애 소설 <미인> ⓒ이현경



박정애 소설 <5화>



계축년(현종 14년, 1673), 양주 소요산, 문수사

문수사 사미 처경이 집게손가락을 세 번 튕기고, 나지막이 게송을 읊는다.

“버리고 또 버리니 사는 동안 기약일세. 탐, 진, 치 다 버리니 목숨마저 있고 없고. 옴 하로다야 사바하. 옴 하로다야 사바하. 옴 하로다야 사바하.”

끄응.

이를 악물고 힘을 주자, 며칠째 창자에 눌어붙어 있던 대변이 그제야 덩어리져 나온다. 시원한 변통(便通)을 위하여 처경은 몇 번이나 더 이를 악문다. 변비로 적년신고(積年辛苦)하던 어미 생각이 처경의 잇새에 물려 신음은 사뭇 커진다.

풀로 뒤를 닦고 물통의 물을 따라 손을 씻는다.

“비워서 가벼우니 채울 것이 가득하다. 꿈같은 이 세상, 바로 보기를 원합니다.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허리끈 매고 해우소 문을 열며 더듬더듬 신을 갈아 신자니, 문득 인기척이 느껴진다. 법랍 십오 년의 비구 원정이 바싹 다가서며 눈인사를 한다. 해우소 근방에서는 인사하지 말고 스리슬쩍 비켜 다녀야 한다고 배운 처경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원정이 처경의 귀에 입술을 갖다 대다시피 하고 속삭인다.

“샘에서 잠시 기다리게.”

원정은 키가 훌쩍하고 낯빛이 해맑고 썩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젊은 비구다. 말본새도 여느 비구보다 부드럽고 점잖다. 모든 이에게 친절한 그는, 이제 겨우 행자를 면하고 사미계를 받은 처경에게도 한결같이 다정스럽다.

처경은 사하촌(寺下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미나리꽝 옆 옹달샘에서 손을 씻는다. 어미 생각과 원정의 음성이 겹쳐 마음이 적이 소란스럽다. 처경은 세수진언을 외운다.

“활활 타는 저 불길 끄는 것은 물이러니. 타는 눈 타는 경계 타는 이 마음, 맑고도 시원한 부처님 감로. 화택(火宅)을 여의는 오직 한 방편. 옴 주가라야 사바하. 옴 주가라야 사바하. 옴 주가라야 사바하.”

목탁을 치는 듯 고른 발소리에 처경이 일어서 합장한다. 원정이 앉아 손을 씻는다.

“더러움 씻어내듯 번뇌도 씻어야 할 텐데? 이 마음 맑아지니 평화로움뿐인가? 한 티끌 더러움도 없는 극락정토가 이생을 살아가는 내 단 한 가지 소원인가? 진정으로?”

원정이 거예진언(去穢眞言)의 구절구절을 의문형으로 바꾸며 활짝 웃는다.

“문밖에서 듣자 하니 버리려 힘쓰는 소리가 가히 장하더군.”

“송구스럽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그뿐인가? 똥 덩어리 떨어지는 소리 또한 실로 장하다 아니할 수 없더군.”

처경의 흰 뺨이 백일홍 꽃 빛으로 물든다.

원정이 처경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보라. 이 육체를 보라. 온갖 오물로 가득 찬 이 가죽 주머니를 보라. 이 병의 온상을, 온갖 번뇌 망상의 이 쓰레기 더미를, 그리고 이제 머지않아 썩어버릴 이 살덩어리를 보라. 이 육체는 마침내 부서지고야 만다. 병의 보금자리여, 타락의 뭉치여, 아아, 이 삶은 결국 죽음으로 이렇게 끝나고야 마는가.”

처경의 숨결이 거칠어진다. 원정이 읊은 《법구경》의 구절들은 육체의 참혹한 진실을 말하고 있으나, 그의 음성은 음악 같다. 처경은 견디지 못하고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쉰다. 원정이 처경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네의 육체가 참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나에게 혜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처경으로선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물음이다. 처경의 귓불까지가 빨갛게 물든다.

“갓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이런가. 해 뜨는 푸른 바다의 숨결이런가. 내 몸을 씻고 씻은 이 물마저도 유리계를 흐르는 푸른 물결 될지라. 옴 바아라 뇌가닥 사바하.”

처경이 원정을 따라 세 번 염송한다.

옴 바아라 뇌가닥 사바하. 옴 바아라 뇌가닥 사바하. 옴 바아라 뇌가닥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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