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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07 09:45 수정 : 2014.01.10 10:25

박정애 소설 <6화>



“하하. 말이 너무 많았구먼. 지응(智膺) 스님께서는 팔 년째 묵언수행 중이신데.”

“정말 팔 년 동안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처경의 물음에 원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목격한 바로는 그러네. 그래도 해우소에서 힘쓰는 소리는 더러 내셨겠지?”

처경의 볼이 또 화끈 달아오른다.

원정이 입술을 처경의 귓불에 갖다 댄다.

“오늘 저녁샛별이 뜨고 한 식경쯤 지난 다음, 지응 스님 수도하시는 암굴로 가게나. 달이 없는 밤이니 요령껏 더듬어 찾아가게. 웬 미인이 기다릴 게야.”

처경은 숨을 쉴 수 없다.

“허 대감댁 자부께서 처경, 자네를 점찍었다네. 부처님 은덕일세. 이번 기회에 대지와 화합하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누려보시게.”

처경이 놀란 토끼 벼랑 바위 쳐다보듯 눈만 껌벅거리자, 원정이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부인이 포태를 못 하여 쫓겨나게 생겼다니 그 아니 가여운가. 여태껏은 내가 육보시를 했네만, 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처경이 고개를 저으며 귀를 막는다.

“사형, 처경은 지금부터 귀먹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원정은 처경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부인의 권세면 우리 절 같은 말사(末寺) 하나쯤 내일 당장 도륙을 낼 수도 있거니.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부처님 가피로 혹 자식을 얻더라도 마음속으로 어떤 한 승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면 심히 괴로울 터이니 차라리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편이 좋을 거라 하시더군. 그럴 법한 말씀이 아닌가?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이 우리 사문(沙門)의 도리임을 명심하게. 무엇이 진정한 자비심인지도.”

처경의 무릎이 꺾인다. 가슴 아래쪽이 격렬히 아파온다. 무엇이 진정한 자비심인가? 처경은 상체를 수그리고 손바닥으로 명치끝을 누른다.

“왜 하필 지응 큰스님 계신 암굴이오?”

“도력(道力)이 뻗친 곳이라 밤말 듣는 쥐가 없거든. 스님께서는 끝내 묵언이시고. 너무 오래 말을 금하셔서 이제는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신 것 같아. 달리 생각하면, 자네의 자비행이 우리 큰스님의 수행에 새로운 경지를 더해드릴 수도 있는 것일세. 나는 무엇이든 늘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원정의 음성과 발소리가 함께 멀어져간다.

처경은 오랫동안 일어서지 못한다.

동그마니 솟구쳤다 골짜기를 향해 내리 뻗치는 샘물. 저 물은 언제부터 흘렀으며 언제까지 흐를 것인가.

허 대감댁 자부. 콧대가 날렵하고 인중이 유달리 오목하며 입술이 꽈리처럼 도톰한 미인.

그끄저께 법당에서 그녀의 광채 도는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처경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명치끝을 있는 힘껏 눌렀는데도 아랫도리는 눈치 없이 성을 냈더랬다.

어쩌면 그 미인, 그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승복 아래 곤두선 이놈의 양물을 봤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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