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애 소설 <9화>
“그럼 틀렸소. 다 그 집 비복들인데 누가 증인을 서줄까. 난들 유철과 상간을 했겠소. 하도 뻔질나게 찾아오기에 다과를 대접한 적은 서너 번 있지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비복들이 더 잘 알지요. 그런데도 누구 하나, 날 위해 증인을 서주지 않는다오.”
진웅이 눈물을 참는 듯, 낯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린다.
“천하에 가여운 것.”
나졸이 또 참견한다.
“기다려보오. 시방 병조판서께서 사방팔방 알아보시는 모양입디다. 설마 없는 일을 가지고 죽이기야 하겠소?”
나졸은 병조판서 김석주의 심복이다. 석주는, 진웅이 섬긴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조카로 서인의 책사다. 그는 백부의 천첩에 불과한 진웅을 남 유달리 살갑게 챙겨주었다. 진웅은 그것이 고마워 예형에게 얻어들은 허적 집안의 속내를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일러바치곤 했다. 그제 밤에도 석주는 진웅이 허견에게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들이댓바람에 달려와 꼬치꼬치 내막을 캐묻고 갔더랬다.
예형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혀끝으로 입가를 닦는다.
“요즘 우리 자매를 두고 장안이 떠들썩하겠구먼.”
나졸이 손사래를 친다.
“에이, 그럴 리가. 어딜 가나 이차옥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습디다. 그 이상 가는 술안주가 없어요. 이차옥이가 불쌍타, 허견을 때려죽여야 한다는 게 장안의 공론이지요.”
진웅과 예형이 말없이 눈빛을 교환한다. 나졸도 어쩔 수 없는 사내붙이로다. 두 얼녀가 억울하게 맞든지 죽든지 세상은 크게 관심이 없다. 다만 한 반가의 미인이 피랍됐다 닷새 만에 돌아온 사건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도 이차옥이, 이차옥이, 해쌓기에 얼마나 고운지 내가 포도청에 가서 직접 구경을 다 했다오.”
“의금부 나장이 할 일도 없구려.”
진웅이 은근히 흉보는 말을 해도, 나졸은 제 얘기에 빠졌다.
“미인은 미인입디다. 설부화용(雪膚花容)에 단순호치(丹脣皓齒)라더니. 허리는 또 어찌나 가느다란지. 도화서 화원들도 여남은이나 와 있습디다. 미인도를 그리겠다고.”
“피랍된 일이 없다고 딱 잡아뗀다면서요?”
“포도대장이 서인이니 어떻게든 구슬려서 자백을 받아낼 거요. 이차옥이네 친정집 비복들은 이미 어느 정도 인정을 한 모양이더라고. 안장 얹은 말도 그 비복들한테서 나온 단서라오. 그 말을 몰고 와서 이차옥이를 납치한 종놈만 구인(拘引)하면 결판이 날 텐데, 허적의 집에서 그놈을 내놓지 않으니 문제지. 영의정 집엘 불문곡직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포도대장이 집 앞에 군관을 붙여놓고 그놈 나오기만 기다린다는데…….”
“벌써 빼돌렸을 거요.”
나졸과 진웅이 예형에게 눈길을 돌린다.
“허적이 영의정 자리에 있는 한, 이차옥은 끝까지 잡아떼는 수밖에 없소. 그러나 귀히 자란 양갓집 여자가 얼마나 버틸까.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서인 포도대장이 심히 괴롭힐 테고 사실을 말하면 남인 정권이 무고죄로 유형을 보낼 테니, 절세미인의 팔자도 더럽게 꼬이는구먼.”
나졸이 죽 단지를 꺼내고는 옥문을 잠근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구려. 서두르시오.”
진웅이 다급히 묻는다.
“아우야, 네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살 길이 없소.”
“왜? 내가 서인들을 찾아다니며 손발이 닳도록 구명 운동을 하마.”
예형이 거의 웃다시피 입꼬리를 올린다.
“형님, 그럴 필요 없소. 서인들은 남인을 치는 돌멩이로 형님을 이용할 뿐인걸. 일은 잘못될 게 뻔하고 형님만 무고죄로 귀양을 갈 거야. 우리한테는 친정도 시집도 없어. 당파도 없고 나라도 없어. 이번 참에 가산 정리하고 어디 조용한 절에나 가서 숨어 살구려. 그저, 어찌 됐거나, 목숨을 부지하오.”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으며 돌아서는 진웅의 귀에 예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못난 아우한테 무얼 더 해주고 싶거들랑…… 소요산 문수사 처경 스님…… 그 스님, 한번 불러주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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