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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02 20:52 수정 : 2014.01.03 15:12

지난달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박한창(맨 왼쪽)씨와 임남규(왼쪽 셋째)씨가 베트남 파병 당시 상황을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에게 말하고 있다. 이들이 서 있는 51번 묘역에는 베트남 전사자들이 묻혀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4 기획]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① 연재를 시작하며

박태균 교수는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현재 서울대에서 국제대학원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베트남전쟁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쓰기도 한 그가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한겨레> 지면에 격주로 풀어낸다.

‘월남에서 전사’라는 구절이 비석 뒤편에 새겨진 묘지들이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한편에 자리잡고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묘지 앞에는 작은 추모석도 놓여 있다. “보고 싶다 내 아들 꿈에라도 보여다오”(육군병장 김동인의 묘, 1970년 3월14일 월남에서 전사) “보고 싶은 내 아들 윤아 세계평화를 위해 고이 잠든 윤아! 보고 싶구나 웃던 그 모습 꿈에라도 한번 만나다오”(해군중사 박세윤의 묘, 1970년 3월31일 월남에서 전사)

올해로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지 50년이 되었다. 1964년 9월22일 한국군의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이 사이공(현 호찌민)에 도착했고, 이들은 곧 호찌민에서 약 100㎞ 떨어진 붕따우에 배치되었다. 이후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모두 4차례의 파병을 통해 32만5000여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었고, 이 가운데 5000여명이 전사했다. 참전 뒤에도 1만2000명의 장병이 고엽제로 인한 질병 판정을 받았다. 이들은 왜 머나먼 이국에서 죽어가야 했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생해야 하는가?

영국과 프랑스는 참전을 거부하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대규모, 장기간의 해외 파병이었다. 조선시대 몇 차례에 걸쳐 중국의 명나라를 돕기 위한 파병은 있었다. 이는 대개 명나라와의 관계 유지를 위한 명분 때문이었으며 한반도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파병된 것이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면서 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 파병된 첫번째 사례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장기간의 작전과 전투가 벌어진 유일한 파병이기도 했다.

한국은 왜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해야 했을까? 왜 그 먼 곳에서 많은 한국 군인들이 죽어가야 했는가? 미국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거부했음에도, 왜 한국 정부는 파병을 결정했던가? 외국 군대가 한국의 방위를 지켜주는 상황에서 한국군이 다른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파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1964년 9월22일 사이공 도착한
제1이동외과병원·태권도 교관단
첫 파병부터 1973년 3월까지
32만5000명이 베트남에 갔고
그중 5000명이 못 돌아왔다

최초의 장기 해외 파병으로
경제 성장하고 서구문화 유입
남북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주민등록제도의 본격 추진 등
거대한 변화가 한국을 덮었다

9년에 걸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한국 사회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의 기간은 한국 사회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시기였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한 보완계획이 나온 게 1964년이었으며, 1967년의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마무리된 때가 1972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 8·3 조치(1972년 8월3일)가 있었지만, 한국 경제는 국민총생산 연평균 8% 이상의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다. 이 역시 한국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경험이었다.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베트남에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서구의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유입되었다. 미니스커트가 등장했고, 단발령(1895년) 이후 처음으로 장발이 유행했다. 트로트 대신 통기타 가수들이 인기를 얻었고, 베트남을 통해 미국과 일본의 전자제품이 국내에 유입됐다.

한국전쟁 시기 대규모 군대를 파병한 중국 내부의 사회통제가 강화되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징병제의 강화, 주민등록제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주민등록제도는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지만, 베트남 파병 시기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실시됐다. 물론 여기에는 남북관계의 악화라는 외부적 요인 역시 중요하게 작동하였는데, 당시 청와대 습격사건이나 푸에블로호 사건 등은 모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깊숙이 관련이 있었다. 이는 또한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으로 위기를 느낀 북한 정부가 공격적인 대남 정책을 채택하면서 나타난 사건이며, 이 시기 북한의 국방·경제 병진 노선은 북한 사회가 경제적으로 문제를 노정하게 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거대한 변화는 한국 사회에만 있던 게 아니다. 베트남이라는 변방에 위치한 한 국가에 대한 미국의 개입으로 본격화된 이 전쟁은 전세계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1944년에 시작된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 유일의 패권국가로 등장한 미국은 달러의 금본위제(금 1온스=28.35그램=7.56돈당 35달러)를 통해 세계 경제를 통제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따른 미국의 전비 지출로 달러는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자리를 더 이상 지킬 수 없었다. 대신 독일의 마르크화와 일본의 엔화가 달러와 지위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미국 시민은 ‘왜 베트남인가’ 물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잘 나타났듯이 미국 사회는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경험했다. 외부적으로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적국이었던 중국과 손을 잡았고, 사회적으로는 거대한 반전시위의 물결에 휘말렸다. 제2차 세계대전을 포함하여 미국이 건국 이후 해외에서 벌인 전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미국 사회가 처음으로 미국의 전쟁 정책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영화 <플래툰>에서 묘사된 베트남에서의 전투 장면을 티브이로 지켜볼 수 있었던 미국 시민들이 ‘왜 미국이 베트남에 가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 사회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대에 발포한 사건(1970년 5월4일 켄트대 사건)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그래서 당시 미국 사회는 ‘안녕들 하십니까’(Good Morning)라고 스스로에게 물었고, 배우 로빈 윌리엄스는 동명의 영화에서 미군 방송의 진행자로 출연하여 매일매일 베트남 전장에 있는 미군들에게 이 인사를 전했다.

전쟁 반대의 분위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휩쓸었다. 지금은 역사 인식과 과거사 문제, 영토 문제로 한국·중국과 갈등하는 일본은 아시아에서 반전시위가 가장 크게 일어났던 국가였다. 유럽에서 일어난 반전의 분위기는 근대주의(모더니즘)를 넘어서는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 전쟁은 20세기 후반의 냉전적 질서뿐만 아니라 근대의 정신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4년 9월11일 1차 파병단 140명이 탄 배가 부산항을 떠났다. 이들은 11일 뒤인 9월22일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에 도착해 25일 붕따우로 이동했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 수정주의적 학문 경향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배태되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대해 세계의 학계가 던진 질문은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이라는 책으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미국이 왜 베트남에 갔는가?’라는 질문은 ‘미국이 왜 한국에 갔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적인 냉전사 학자인 개디스가 ‘유럽에서 초대받지 않은 소련’이 야기한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했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은 수정주의의 영향 속에서 ‘아시아에서 초대받지 않은 미국’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수정주의가 판을 치고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전혀 다른 흐름이 나타나기도 했다. 타이에서는 1971년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듬해에는 필리핀과 한국에서 계엄령과 유신체제가 선포되었다. 1973년 칠레 쿠데타로 인해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적 선거에 의해 수립된 사회주의 정부가 몰락했다.

역설적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절대적 강자인 미국의 헤게모니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흔들리는 가운데, 미국의 그늘 아래 있던 다른 주변부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나타났다.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베트남이 통일되면서 주변부가 본격적으로 꿈틀거렸다. 1979년 이란과 니카라과를 시작으로 1980년대 중반 필리핀과 한국, 대만(타이완)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다. 영화 <아르고>가 잘 묘사하듯이 이란의 미국대사관에서 인질사건이 발생했고, 필리핀의 미군 기지는 철수했으며, 한국에서는 반미시위가 발생했다.

세계체제의 변화 속에서 비틀스가 한 시대를 풍미했고, 베트남 참전을 거부한 무하마드 알리는 기성 정치인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때 세계 시민들의 영웅으로 추앙됐다. 히피문화가 전세계를 휩쓸었고, 마약이 마치 기존 질서에 반대하는 지성의 상징처럼 되었다. 반전과 평화를 외쳤던 존 레넌은 암살되었고, 독일과 일본의 반전 시위대는 붉은 군대(적군파), 즉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극단적 전체주의 아래 있던 북한이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이 조직한 비동맹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의 대표가 이 회의에 참석을 거절당한 것도 당시 세계적으로 불었던 반전의 바람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반전과 수정주의에 대한 반동 역시 거세게 일어났다.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으로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을 때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했고, 반전과 탈근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새로운 보수주의가 태동하였다. 마치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 이에 대한 반동으로 냉전시대보다 더 비논리적인 보수주의가 나타나는 것처럼.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가 ‘베트남에서 있었던 미국의 전쟁’에 대한 반성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면,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총리, 일본의 나카소네 총리는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바로 이때 일본에서 처음으로 극우적인 역사인식과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과 그 시대의 변화는 어떻게 기억될까? 2000년대 초반 외국에서 있었던 한 학회에서 한국의 한 대학교수는 베트남 전쟁을 ‘한국에게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현재 한국 사회가 기억하는 베트남 전쟁을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일본의 한 총리가 한국전쟁을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라고 표현했다고 알려지면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한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똑같은 목소리를 낸 것이다.

안 병장은 잊혀지고 김 상사만 기억

한국전쟁 특수에 대한 일본 극우세력들의 인식이 전쟁으로 인한 한국인의 고통을 외면했다면, 한국 사회의 베트남 전쟁 인식 역시 전쟁 시기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이러한 유사성은 한국전쟁을 통해 전쟁특수의 혜택을 입었던 일본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전쟁특수를 누린 한국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일본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이 중 특히 전쟁특수 부분이 강조된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 역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서술에서 경제적 측면에서의 전쟁특수가 가장 중요한 내용을 차지한다. 전쟁을 통해 벌어들인 돈은 한국 경제 도약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베트남 전쟁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1970년대 오일달러에 힘입은 중동에서의 건설 붐에 편승할 수 있었다는 것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서술의 주요한 내용이 되고 있다.

1964년 9월23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에서 1차 파병단의 환영식이 열렸다.

이는 미국에서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과는 전혀 다르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에게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운 전쟁으로 기억된다. 이런 인식은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과 같은 베트남 전쟁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영화를 통해 잘 드러난다.

물론 지금의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또다시 베트남 전쟁과 같은 늪에 빠져 있다. 인간은 망각을 잘하는 바보이기 때문에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더 이상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도 20년도 되지 않아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최근의 전쟁 이론을 미국이 증명해주는 걸까.

한국 사회는 다르다. 2003년 한국 정부가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과 기억이 잘 드러났다. 당시 국회에서 때아닌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전쟁특수를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의 특수를 기억하는 일본인들이 자위대 파병을 지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라크에 대한 한국군의 파병을 지지했다. 이라크 파병이 또 다른 특수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을까? 아니면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다시 재현되리라고 믿은 걸까.

이러한 인식 속에서 <무기의 그늘>(황석영 지음)의 주인공인 안영규 병장의 경험은 베트남 전쟁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다. 고엽제의 피해와 전쟁의 트라우마에 고통받는 참전군인들도 잊혀진다. 전쟁 시기의 양공주와 라이따이한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베트남은 한국인들에게 또 다른 이국적 여행지로 기억될 뿐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들은 베트남 전쟁을 한국전쟁과 같은 남북전쟁으로 정의한다. 또한 젊은 세대들에게 베트남 전쟁은 뮤직비디오 ‘아시나요’(조성모)를 통해 기억된다.

한국 사회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는가? 과연 베트남 전쟁은 무엇이었고, 그 전쟁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왜 특정한 측면의 기억만이 남았을까?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베트남 파병으로부터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국립묘지를 찾았다. 베트남에 처음으로 파병되었던 제1이동외과병원 소속이었던 임남규, 박한창 두 분과 자리를 함께했다. 두 분과 함께 찾은 베트남 전사자 묘역은 2번 묘역과 51번 묘역이었다. 51번 묘역에서는 두 분과 함께 참전했다 돌아가신 분이 묻혔다. 그리고 2번 묘역 맨 앞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주베트남 한국군 초대 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묻혔다. <베트남 전쟁과 나>라는 회고록을 집필한 채 장군은 한국군뿐만 아니라 미군에게도 높이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숨을 거두면서 장군 묘역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 함께했던 사병 묘역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기에 사병 전사자 묘역의 맨 앞에 묻혔다.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역설적인 상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피 흘린 장병들은 모두 어디에 갔는가? 사무치게 보고 싶다는 부모님의 편지 아래 누워 있는 그들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서구의 기억 속에서 한국군은 모두 사라졌다. 서양의 역사가들이 쓴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에서 한국군의 존재를 찾기는 불가능하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이다. 베트남에 있는 전쟁기념관에는 한국군과 관련된 사진이 거의 없다. 한국군이 활동했던 지역에 한국군의 활동과 관련된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베트남에서도 미국에서도 역사 속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모습은 지워졌다.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라면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은 ‘잊혀진 군인’인가?

그래서 불가피하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국군에 대한 미국 정부의 평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필요로 할 때에는 매우 효율적인 군대라고 높이 추어올리다 한국군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야 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한국군이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막상 전쟁터에서 주역이었던 한국의 참전 군인들은 정치적 이유로 인해 지금 그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서 평가받지 못했다.

전쟁특수 혜택 입은 우리는
트라우마 시달리는 참전군인과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 외면했고
‘신이 내린 선물’로 기억한 채
또다른 파병을 지지했다

베트남의 전쟁기념관에는
한국군 사진은 거의 없고
미군은 비효율적인 군대로 평가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라면
베트남전 한국군은 ‘잊혀진 군인’

이와 함께 서글픈 사실은 베트남 전쟁 자체와 한국군의 참전을 둘러싼 평가가 한국 사회의 이념적 분열의 한 표상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가 언급될 때마다 한국 사회는 몸살을 앓는다. 냉전체제 아래서 모두가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던 전쟁, 그러나 그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이번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첫째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밝히자는 것이다. 잘못 알려지거나 축소된 사실들이 특정한 기억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른 측면의 기억들은 잊혀지고 있다. 둘째로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기억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그대로 작동된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현재 한국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크다. 셋째로 이를 통해 현재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이며, 그 교훈을 통해 균형적이면서도 사실에 기반한 기억을 재생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국립묘지를 떠나는 길에 찾았던 휴게실에서는 서화 전시회를 하고 있었고, 그중 한 작품에서 학도병의 편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혀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작가에 따르면 이 편지는 1950년 전사한 한 학도병이 썼다. 베트남 파병 50년을 맞아 특집 기획을 시작하면서 64년 전에 한 학도병이 썼던 편지가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왜 인간은 전쟁을 통해서 스스로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갈까? 우리 사회가 또다시 그와 같은 비극적 상황을 경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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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박태균의 베트남전쟁’은 다음 회부터 토요판 지면에 실립니다. 1월11일치에 2회가 실린 뒤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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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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