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01.10 19:04 수정 : 2014.01.12 11:50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11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먼저 제안했다. 미국이 한국군 감축 계획을 검토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② 왜 파병?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인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몇 해 전 중동에서 온 전문가들 앞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를 듣고 나서 이집트에서 온 한 전문가가 질문을 던졌다. 당시 베트남전쟁과 한국은 무슨 관계가 있었는가? 미군이 한국의 방위를 지켜주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다른 나라를 위해 파병하는 게 가능한 일이었는가?

파병을 결정한 박정희 대통령이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면 뭐라 했을까.

“솔직한 이야기를 하자면 만약 우리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의 내 추측으로는 주한미군 2개 사단이 월남으로 갔을 것이다. 당시 월남, 미국 정부가 한국군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보내기 싫으면 안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미군 2개 사단이 갔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박정희 연설집(부록)> 1967년 1월17일 대전유세)

파병을 결정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군이 가지 않았다면 주한미군이 베트남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고 답변했다. 주한미군의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이동했다면, 한국의 국방력이 급격하게 약화될 수 있었다.

주한미군 내에서도 이런 소문이 돌았던 것 같다. 전방에 있던 주한미군 하사관 젱킨스는 1965년 1월 한국에 있던 자신의 부대가 베트남으로 이동하는 것이 무서워 월북했다고 한다.(그는 최근 일본으로 귀환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선은 미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미국 정부는 실제로 주한미군의 일부를 베트남으로 옮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 전 대통령은 파병에 반대했다. “월남 파병으로 휴전선에 긴장상태가 조성되고 국내의 오열(五列·간첩)이 준동한다면 자유 아시아에 두 군데 전선이 생길 염려가 있어 이렇게 될 경우 미국 측에는 오히려 이중 부담이 된다. 6·3 사태 등 박 정권의 행적으로 보아 새로운 계엄 선포와 헌정 중단의 구실을 찾자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동아일보> 1965년 1월22일치)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동시전쟁 가능성?

한국군 파병에는 논란이 있었다. 우선 한반도 자체의 안보 문제다. 자기 나라의 방위를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의 방위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수 있을까? 그것도 의무부대나 건설부대가 아니라 전투부대를 대규모로 파병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한국군의 전투부대가 빠진다고 주한미군 병력이 증강되는 것도 아니었다. 베트남으로 파병된 한국군을 보강하기 위한 병력 충원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한국 국내외 정치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이 복잡한 상황을 조성하였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는 4·19 혁명 이후 가장 큰 반정부 시위였다. 주한미국대사관이 이 시위로 박정희 정부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또한 같은 해 중국은 핵실험에 성공했다. 1949년 소련 핵실험이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의 핵실험 역시 한반도에 어떠한 파장을 가져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은 한일협정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북한의 <로동신문>에는 한일협정이 한-미-일 삼각동맹을 형성하여 북한을 위협할 거라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1965년 일본 의회에서 한반도 긴급사태 발생 시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을 상정했던 미쓰야(三矢) 계획이 폭로되기도 했다. 또 미국이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전쟁이 진행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1966년 당대표자회에서 4대 군사노선을 재확인하였고, 이후 남한에 공세를 강화하였다.

물론 북한의 예측은 오판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 문서를 보면 미국은 베트남 이외 지역의 전면전 발생을 최대한 방지하려 했다. 1968년 푸에블로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북한의 오판이 낳은 공세적 정책은 한반도의 위기를 고조시키기 충분했다.

한일협정을 전후해 국내적으로 정치적 위기가, 밖으로는 안보적 위기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베트남 파병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미국 정부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존슨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한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곧이어 남베트남 정부가 한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한국 정부는 1964년 봄이 가기 전에 파병을 결정하였다. 처음에는 의료부대와 태권도 부대 등 남베트남 정부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로 제한했지만, 미국 정부가 더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하자 한국 정부는 곧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하였고, 1965년 10월 전투부대 파병을 시작했다.

한국군 증강 위한 이승만의 파병 제안

왜 한국 국내외 안보가 불안정한 시기에 정부는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을까? 공식 발표처럼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 갔을까? 아니면 한국과 베트남의 오래된 관계로 인해 파병을 통해 도와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가?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상 유사한 점이 많다. 양국은 중국의 주변부에 있으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국과 조공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한 점이나 중국 유교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점 역시 비슷하다. 19세기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조선 지식인들은 <월남패망사>를 읽으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고 있었다. 1945년 이후 한국과 베트남은 냉전체제로 인해 분단되었다.

한일협정 반대시위 고조되고
한미일 동맹에 북한 반발하며
중국에서 핵실험까지 성공한
내우외환의 상황 속에서
빠르게 파병 결정한 박정희 정권

한반도 군 유지비 부담 느낀
미국 정부는 정전협정 이후
주한미군·한국군 감축 검토
감축 계획이 구체화될 무렵
오비이락처럼 파병 결정됐다

이런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남베트남 지원이 한국의 자체 안보에 ‘직접’ 도움이 되는 것이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한국 정부는 왜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했을까?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주한미군의 이동과 감축을 막겠다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또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준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으며, 또한 미국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보은의 측면도 존재했다.

좀 더 중요한 문제는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이 정전협정 직후부터 추진했던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동시 감군 정책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직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관할하도록 한 1954년의 ‘한-미 합의의사록’은 미국이 한국군의 유지비를 지원하도록 규정했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이로 인해 막대한 한국군 유지비를 지원했던 미국은 재정 부담을 줄이려 한국에 있는 한·미 양군의 감축 정책을 추진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에 반발했고 그 대응으로 한국군의 해외 파병을 추진했다. 한국군이 해외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역할을 한다면, 한국군을 감축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1954년과 1958년 한국군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대가로 한국군의 증강을 요구했다. 1959년에는 라오스 내전에 개입할 의사를 표명하고, 비밀리에 국방부 정보기관 책임자 이후락을 라오스에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1950년대 말 소련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한·미 양군의 감군 정책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지만, 케네디 행정부가 수립된 이후 감군 정책이 다시 추진되었다. 5·16 쿠데타 하루 전인 1961년 5월15일 국가안보회의 483차 회의에서 케네디는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임무팀(Presidential Task Force on Korea)을 구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임무팀이 제출한 보고서는 한국에서 경제개발계획과 사회개혁을 실행해 미국의 원조를 좀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인데, 이와 동시에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감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2개월 후에 한국군 감축을 위해 미국 정부는 국무부와 국방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들이 참여하는 ‘조정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물론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한국군의 유지 비용이 싸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군축이 오히려 광범위한 실업자군을 양산해 한국 경제에 짐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 내에서도 한국군의 감축이 박정희 정부에 정치적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1961년 케네디 만나 파병 제안했던 박정희

그러나 주한미국대사와 국방부는 구체적으로 군축안을 마련하였다. 이에 더해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는 한 보고서에서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하더라도 남한군의 군사력이 북한군을 능가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1963년 민정 이양을 전후한 시기에는 3~5년에 걸쳐 주한미군과 함께 단계적으로 한국군 25만명을 감축하는 방안이 제시되었고, 1965년 백악관에 제출된 ‘국가정책보고서: 대한민국’에서는 한국군 10만명의 감축이 규정되었다. 한국에 대한 원조도 미국 대신 일본이 부담해야 한다는 점 역시 언급되었다.

미국 관료 일부가 염려한 것처럼 박정희 정부한테 감군은 큰 부담이 되었다. 군축은 가뜩이나 좁은 군대 내 승진 기회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박정희 정부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또다시 한국군의 해외파병이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이 제안이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오비이락(烏飛梨落)이었는지는 정확지 않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 때처럼 그 시점이 일치한다.

이 카드를 내놓은 건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였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지 않았던 박정희를 파격적으로 대우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아직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개입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제안을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존슨 대통령이 더 많은 동맹국을 베트남에 연루시키기 위해 ‘더 많은 깃발’(more flag) 정책을 제안하면서,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감축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게다가 한-미 동맹이 형성된 이후 처음으로 미국이 한국에 한 요청이기 때문에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뀌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했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는 존슨 정부의 정책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결국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이유는 주한미군의 규모를 유지함으로써 북한에 대응하는 안보력 약화를 막기 위한 것, 한-미 동맹에 대한 고려, 미국의 주한미군 및 한국군 감축 정책에 대한 대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도덕적 측면을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세계적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공헌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한일협정에 집중되어 있었던 사회적 관심을 베트남으로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경제적인 요인은 베트남에 대한 전투부대 파병이 본격화된 1965년 이후에야 파병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가 되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그렇다면 다시 물어봐야 할 질문들이 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평가하려면 기본적으로 파병의 근본적 이유와 목적이 예상한 대로 달성되었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두고서는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평가가 이루어졌다. 과연 이러한 평가는 올바른 것인가?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았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해 자유세계를 지키는 동시에 한-미 동맹이 굳건해지고,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감축되지 않았으며, 한국의 안보는 더욱 안정되었는가?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1968년의 안보위기와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의 감축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