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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 ③ 두 개의 전선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1966년 10월31일 미국 대통령 존슨이 한국을 방문했다. 마닐라에서 베트남전 참전국 정상회담을 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의 방문은 파격적이었다. 다른 미국 대통령들은 길어야 이틀, 어떤 경우에는 반나절이었는데, 그는 장장 3일이나 한국에 머물렀다. 새로운 신조어도 만들었다. 바로 ‘존슨탕’이다. 미군부대를 방문하여 소시지와 햄이 잡탕이 된 부대찌개와 비슷한 음식을 맛본 뒤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찌개의 이름은 ‘존슨탕’이 되었고, 부대찌개에 존슨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방문 기간 중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군사분계선에서 북한군이 미군을 습격했다.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계획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대규모였다. 미군 6명과 한국군 카투사 1명이 사망했다. 당연히 미군에는 비상이 걸렸다. 브이아이피(VIP)가 한국에 왔을 때 북한군이 움직인 것이다. 존슨 대통령은 비무장지대(DMZ)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존슨을 가장 당혹하게 했던 푸에블로호 납북
주한미군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에 대한 전쟁 선언이라고 해도 될 만한 도발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즉각 조사에 들어갔다. 북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인가? 1958년 이후 남한의 미군부대에 핵무기가 설치되어 있는데도 말인가?
조사 결과는 의외였다. 북한군의 도발은 그 이전에 있었던 한국군의 북한 부대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 닷새 전인 1966년 10월26일, 한국군이 북한의 연대 사령부를 공격해서 연대장을 비롯한 상당수의 북한군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 5일 전의 일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정일권 총리에게 항의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사실 1966년 존슨 대통령 방문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었다.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도 베트남에 파병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한국이, 그것도 전투부대를 보내준 것이다. 그 규모 역시 1000명도 안 되는 군대를 파병한 타이(태국)·필리핀·오스트레일리아(호주) 등 다른 나라에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규모였다. 존슨의 ‘더 많은 깃발’ 정책에 호응해 준 대가였다. 물론 실제 방한 이유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을 미국에 초대하여, 지금의 한국 대통령은 꿈도 꿀 수 없는 뉴욕에서 카퍼레이드를 마련해 주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설립을 선물로 주었던 존슨 대통령의 3일간 방문은, 한국과 같이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라에서 그 지도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방문 마지막 날에 있었던 북한군의 공격은 제대로 초를 친 것이다. 그 원인 제공자가 한국군이었으니 문제는 더 심각했다.
1966년에 발생한 이 사건은 그 이후 사건들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1965년과 1966년 한 해 30~40여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 남북한 사이의 교전은 1967년에는 400회를 넘어섰고, 1968년에는 1년간 500여회에 달하도록 급증했다. 거의 전쟁에 가까운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베트남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또 하나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1967년 12월 주한미군 사령관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반도에서 게릴라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공세적 전략이 단지 도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게릴라 부대를 남파해서 베트남과 같은 게릴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제2의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도 있다고 발표했다.
1967년 12월의 한국 신문들은 전쟁 전야에 발간된 신문 같았다. 북한의 공세에 대한 기사가 연일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 와중에 12월25일 북한은 미군 함정을 나포했다는 긴급 방송을 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67년 12월26일치)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하기 정확히 한 달 전의 일이다. 게릴라전에 대한 경고가 이듬해 11월의 울진 삼척 사건을 예고했다면, 이 기사는 푸에블로호 사건을 미리 예견한 것인가?
한국 정부는 1968년 1월6일 비상치안회의를 제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에서 소집했다. 북한이 어떠한 도발을 할지 모르니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뿐만 아니라 경찰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회의였다. 보름이 지난 1968년 1월21일엔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틀 뒤엔 동해에서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6년 전의 일이다.
사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예견되었다. 1965년 전투부대 파병을 반대했던 야당은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한국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뿐만 아니라 휴전선에서 한국군의 방위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경향신문 1965년 8월4일치) 실제로 1968년 1월21일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들에 의해 휴전선이 뚫렸고, 이들이 청와대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후에 존슨은 1968년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1968년에 일어난 일들 중에서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1월23일이었다. 그날 푸에블로호가 납북되었다.” 1966년 존슨 대통령 방한 중
북한군이 미군을 습격했다
이는 심각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이는 5일 전 한국군의
북한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 베트남전 격화되는 시점에서
한반도 역시 전쟁터가 됐다
그렇다면 베트남전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겠다는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미국은 왜 원산을 폭격할 수 없었나 당시 미국은 정신이 없었다. 기대와는 달리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푸에블로호 사건 일주일 후에 있었던 베트콩의 구정공세는 미국 전역을 흔들어 놓았다. 구정공세는 베트콩의 군사적 실패였지만, 정치적으로 미국을 곤경에 빠뜨렸다. 티브이를 통해 베트남의 전선을 지켜볼 수 있었던 미국 사회에서 구정공세를 계기로 반전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존슨 대통령에게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더 황당했다. 베트남이 아닌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 안에는 미국의 정보활동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푸에블로호에 승선하고 있던 70여명에 이르는 미군들은 북한군에 생포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던 베트남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한반도에서 터졌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인공위성이나 정보초계기가 활동하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국경지역과 배 위에서 상대방의 무전을 도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보활동이었다. 군사분계선에도 정보수집 활동을 하는 한국군과 미군이 있었다. 그중의 정보함 하나가 적에게 나포된 것이다.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어 정박하던 원산항을 폭격하는 방안에서부터 소련한테 압력을 가하여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풀어주도록 하는 것까지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었다. 베트남에 발이 묶여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베트남이라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와중에 또 하나의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단지 판문점에서 북한과 만나 이들을 풀어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년이 지난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푸에블로호의 선원들이 귀환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북한의 영해에 침범했다고 인정하는 문서를 북한 쪽에 전달했다. 세계 최강 미국으로서 치욕이었다. 당시 군사분계선에서 활동했던 한 미군 병사에 따르면 푸에블로호 사건 직후 북한에서의 무선을 도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납치는 고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미군과 전쟁을 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 보고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미군이 원산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지 않았던 한 이유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1968년 1월이라는 시점에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그것도 베트남에서 한창 전투가 진행되는 시점에. ‘벼랑 끝 전술’의 대가인 북한이 베트남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미국에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던 것인가? 상황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우선 북한의 공세가 강화된 것은 사실이다. 북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북한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돕는 방법으로 한반도에서 안보위기를 일으키는 방안을 선택했다. 한반도의 안보상황이 불안해진다면 더 많은 한국의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투 요원의 일부를 북베트남에 보내 직접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한반도에 안보위기를 조성하는 것 역시 측면 지원의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호찌민과 가까운 관계였던 김일성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1966년의 조선노동당 대표자회 직후부터 남한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었다는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최근 공개된 동독의 외교문서도 이를 잘 보여준다. 중국 정부는 베트남에서의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북한 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엔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독일지역 북한기밀문서집” 39~43쪽) 이 문서는 한미일 삼각동맹에 의해 미국이 한반도에서 또 하나의 전쟁을 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서 중국의 요구를 거절하는 내용이 담겨 있지만, 실상 북한이 베트남을 돕기 위해 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전술을 펼친 것은 분명하다. 손바닥은 마주쳐야만 소리가 나는 법. 북한의 적극적인 공세만으로 남북한 간의 충돌이 10배 이상 급증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는 남한 정부의 새로운 전술이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6년 10월 존슨 대통령 방한 직전에 있었던 남한군에 의한 북한 공격은 그 신호탄이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직후에 향후 북한에 대한 전술을 논의하기 위해서 방한한 사이러스 밴스 특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회담한 직후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1967년 이후 발생한 남북 충돌 사건의 3분의 1은 남한 쪽에 의해 발발한 사건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본스틸 장군으로부터 얻은 정보였다. 이진삼 전 의원이 증언한 ‘북한군 33명 사살’ 1967년 휴전선에서 남북 간의 교전이 급증하면서 주한미군 사령관은 북한이 점점 더 공격적인 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에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자주 워싱턴에 보냈다. 이와 함께 한국 정부가 북한의 공세에 너무나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안보위기가 더 격화되고 있다는 내용 역시 전달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전략은 단지 북한의 공세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발 더 나아가 선제공격(preemptive attack)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적들을 먼저 공격한다는 것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구사했던 전략을 한국 정부가 1960년대에 보여준 것이다. 자유선진당 소속 이진삼 의원(당시)은 2011년 2월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한 증언을 통해서 1969년 9월과 10월 3차례에 걸쳐 북한 부대를 공격해서 약 33명의 북한군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관련 자료는 이미 2008년 기무사령부에서 공개되었으며, 그림에서 보는 작전 지도와 같은 “몇배의 응징으로 적이 다시는 오판을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 배경으로서 베트남전 참전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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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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