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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럽 브라운 주한미국대사가 전달한 브라운 각서는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보낸 한국 정부에 대해 미국이 약속하는 마지막 보상이었다. 1964년 10월14일 박정희 대통령이 브라운 대사를 초대한 파티에서 어린이합창단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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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 ④ 한국과 미국의 동상이몽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1967년 11월25일 주한미국대사 윌리엄 포터는 국무부에 보내는 전문에서 한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어하며, 베트남에 있는 5만명의 한국군을 ‘알라딘의 램프’로 생각하고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알라딘의 램프? 문지르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진인이 나타나는 램프?
포터 대사의 전임자인 윈스럽 브라운 대사는 브라운 각서를 전달한 직후 본국에 보내는 1966년 3월18일자 전문에서 미국 정부의 한국 정부에 대한 전투부대 3차 파병 논의는 한-미 관계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의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했고, 한국 정부는 동맹국으로서 그러한 요청에 가장 성실하게 응답했건만 왜 이런 평가가 나타났던 것일까?
“한국의 수출을 좀 도와달라”던 국무총리
1967년 10월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시)에서 있었던 정일권 국무총리와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 간의 대화는 그 이유를 잘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 참전국 회담 참석차 사이공을 방문한 두 사람은 10월30일 별도로 회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두 사람 간의 대화는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나타났던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준다.
험프리: 한국 정부의 북에 대한 보복 행동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정일권: (이에 대한 대답 없이) 한국 정부가 요청한 구축함 3대 중 2대에 대한 원조가 상원에서 부결되었다고 들었다. 전투병 추가 파병 얘기가 나오면 야당이 이 문제를 들고나올 것이다. 반침투 전술을 위한 레이더와 통신수단을 언제까지 지원해 줄 수 있는가?
험프리: 만약 우리가 지원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한국의 정규군을 도와주어야 하는가?
정일권: (놀라서 한발 물러서며) 주한미군의 계속된 주둔에 감사한다. 지프나 트럭 같은 운송수단의 지원을 원한다.
험프리: 전투병의 추가 파병을 원한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이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정일권: 한국은 베트남에서 승리할 때까지 함께할 것이다. 그런데 반전시위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을 한국에 보내면 모두 전향시킬 수 있다. 다음 베트남 참전 7개국 회의 때는 20만명을 보내서 반전시위를 침묵시키겠다.
험프리: 그건 그렇고, 남한은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돌발행동을 할 것인가? 대통령에게 미국의 뜻을 전해 달라.
정일권: (이에 대한 답변 없이) 한국의 수출을 좀 도와달라. 미국의 무역 보호주의 장벽이 너무 높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싸우고 온 군인들 중 실업자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트남에 파견될 수 있도록 해 달라.
험프리: 지금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이 검토 중이다. 베트남에서 새로 정부가 들어서서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것이다. 채명신 장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이상 주베트남 미국대사관에서 국무부로 보내는 1967년 10월31일자 전문)
동문서답으로 구성된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가 동상이몽의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쪽은 돌발행동을 하지 말 것을 거듭 요청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미국은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군의 값싼 유지비로
전쟁비용을 줄일 수 있었고
더 많은 군인을 투입하면
전쟁에서 이길 거라 생각했다
한국은 더 많은 보상을 원했다
군사원조부터 경제원조까지
파병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미국한테 받아내려 했다
미국의 요청에 의해 한국의 전투부대가 파병되었고, 그 규모 역시 미군 다음으로 큰 규모였지만, 한-미 관계는 겉으로는 개선된 것 같으면서 그 이면에서는 갈등과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왜 이런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었던 것일까? 처음 미국이 요청했을 때 한국 정부의 파병 결정은 한-미 동맹에 대한 고려와 주한미군 감축 또는 베트남으로의 이동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정부는 또 다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더 많은 한국군을 시급하게 원하고 있는 만큼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1966년 초 브라운 각서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브라운 각서는 한국 전투부대 파병의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뿐만 아니라 경제원조를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쪽에서는 브라운 각서를 한국 정부에 대한 마지막 보상으로 생각했던 반면, 한국은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신호로 생각했다. 반전시위 부딪친 미국에 한줄기 희망이란… 미국 정부가 한국 쪽에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한 것은 근본적으로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군이 베트남인들과 비슷하게 생긴 아시아인이었고, 한국군의 유지 비용이 싸면서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1965년 3월30일자, 7월10일자 주한미국대사관 전문) 이 중에서도 특히 한국군의 값싼 유지비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었다. 한국군에 들어가는 비용은 미국에 비해서는 3분의 1도 되지 않았고, 다른 참전국인 타이(태국)군이나 필리핀군 유지비보다도 적었다. 1965년 3월 본격적으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지만, 베트남 전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린든 존슨 행정부는 더 많은 군인들을 투입할 경우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전쟁에서와 같이 베트남에서도 제한전쟁을 통해서도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전투부대 추가 파병이 미국한테는 가장 중요한 전략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존슨의 이러한 판단이 이듬해 봄 브라운 각서를 통해 한국 정부에 큰 선물을 안겨준 근거이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한국 전투부대의 추가 파병을 위해서 한국군이 미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파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전체 미 지상군 중 약 20%가 베트남에 파병되었는데, 한국 역시 60만 지상군 중 동일한 수준의 약 10만명 이상이 베트남에 파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국군의 추가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미국의 요구는 1968년 초 안보위기 때에도 계속될 정도로 절박한 것이었다.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은 푸에블로 사건 일주일 후에 있었던 구정공세 직후 20만명의 군인만 더 있으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의견을 워싱턴에 올렸다. 하지만 미국 안에서 반전시위가 고조되면서 더 이상 미군의 추가 파병은 불가능했다. 남베트남 정부 쪽의 동맹군을 늘리는 유일한 길은 한국군의 추가 파병밖에 없었다. 한국 정부는 점차 미국의 추가 파병이 시급한 요구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투부대 파병으로 무언가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한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단지 ‘돈’만은 아니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자동 개입 조항을 넣어줄 것, 주한미군의 주둔군 지위 협정을 맺어줄 것, 그리고 주한미군 감축을 중지해줄 것 등을 요청했다. 이는 1953년 정전협정 후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미국에 요구했던 숙원 사업이었다. 존슨 행정부의 대답은 자동 개입 조항은 불가, 주둔군 지위 협정은 필리핀 수준으로 가능, 주한미군 감축 시 한국 정부에 사전 협의 가능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더 이상의 양보를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미국의 대한 원조를 더 보상받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국 정부가 꺼낸 카드는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수출 물량을 늘려주는 것이었다. 1965년 5월 초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브라운 대사를 만났다. 국방부 장관은 베트남에서의 군수물자 조달에서 차지하는 한국 기업의 비중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의 여론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막상 전투부대를 파병한 것은 한국인데 돈은 일본이 더 많이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론이 계속 나빠질 경우 한국군의 추가 파병이 어렵다는 입장도 전달했다. 그는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얻은 경제적 이익만큼 한국도 베트남 전쟁에서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전쟁 기간 일본의 부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한국 정부가 일본과 동일한 경험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안보위기’ 제쳐두고 추가 파병에 응한 한국 브라운 각서가 전달된 뒤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추가 원조는 어렵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한국 정부는 계속해서 더 많은 원조를 요구했다. 경제적 측면에서의 원조가 어렵다면 한국군의 현대화를 비롯한 더 많은 장비의 제공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한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정일권 국무총리와 험프리 부통령 사이의 위의 대화에서 잘 나타나는 것과 같이 북한의 도발과 게릴라들의 침투를 막기 위한 장비였다. 1966년 말 이후 북한과의 충돌이 늘어났고, 게릴라들의 침투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추가 파병이 어렵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미국 정부로서도 한반도의 안보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국군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주한미군의 규모도 애초에 약속했던 5만1000명에서 4만3000명으로 감축된 상황이었다.(1966년 12월13일 주한미국대사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지역 담당 차관보에게 보낸 전문) 존슨 대통령은 한국 정부한테 더 많은 군사장비를 제공하더라도 추가 파병 약속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요구하고 있었던 헬리콥터와 구축함의 공여가 가능한지 여부를 거듭 체크했고, 한국군의 추가 파병만이 베트남에서의 승리를 앞당기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존슨 행정부 내에서 베트남 전쟁 정책을 만들었던 모든 입안자들은 이러한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1967년 브라운 대사의 후임자로 온 포터 대사의 임무는 전투부대의 3차 추가 파병을 위한 한국 정부와의 협상이었다. 1967년 9월4일 박정희 대통령은 포터 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추가 파병의 여부는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군사장비가 얼마나 제공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언급했다. 이 시점에서 포터 대사는 한국군의 적극적인 공세가 결국 북한과의 더 많은 충돌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를 받아내기 위한 한국 정부의 전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은 한국 정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알라딘의 램프’라고 말했던 것이다. 포터 대사가 이렇게 판단한 또 다른 이유는 1968년 안보위기 이후에도 한국 정부가 2개 사단의 추가 파병이 가능하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진정 안보 문제가 제일 중요했다면 한국 정부가 안보위기 속에서 추가 파병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힐 수 없었지만, 한국 정부는 추가 파병을 제안했다. 정일권 국무총리는 2개 사단의 추가 파병의 대가로 3개 예비사단을 완전무장 사단으로 전환하고 7개의 후방 예비사단을 정규 예비사단으로 전환해야 하며,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경우 제주도에 미군의 항공 사단 창설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968년 3월8일자 주한미국대사관 전문) 이것은 모두 미국의 추가 군사지원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1968년 4월17일 호놀룰루에서 만난 존슨과 박정희는 추가 파병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지만, 논의는 더 진전되지 못했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반전 분위기도 문제였지만, 존슨 대통령이 재출마를 포기한 상황에서 더는 의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었다. 한-미 관계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한국 정부에 중요한 기회였다. 특히 한국 정부의 위상을 높여줄 수도 있었다. 한국 정부는 또한 베트남에 가 있는 한국군들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도 했다.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김치의 제공을 주장했다.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의 경우 그 작전지휘권이 한국 내에서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했다. 한국군 부상자 및 전사자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가 더 많은 보상을 하도록 협상에 임했다. 북한군에 대한 적극적 대응 또는 선제공격 역시 한국군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주한미국대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한국 정부의 요청은 모두 2차적인 것이고, 1차적인 것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구걸’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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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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