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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36대 대통령 린든 베인스 존슨은 전임자인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에 이어 베트남 전쟁에 더 깊이 개입했다. 1965년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존슨 대통령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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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⑤ 미국은 왜 늪으로 갔나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지금까지도 국제정치학자들, 역사학자들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미국의 개입 이유이다. 미국은 왜 개입했는가? 미국은 베트남에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가? 프랑스 정부와 일부 핵심 관료들이 반대했음에도 미국 정부는 왜 갈수록 베트남 전쟁에 더 깊이 빠져들었을까?
베트남에 적극적인 개입을 결정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5년 미국 시민들에게 미국인들이 왜 베트남에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첫째 이유는 북베트남이 독립국가인 자유 진영의 남베트남을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남베트남 사람들도 자신들의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참여했지만, 그 근원은 하노이에 있다. 존슨은 베트남 전쟁을 한국전쟁과 동일한 유형의 전쟁으로 보았다.
둘째 이유는 그 전쟁이 잔인하다는 것이었다. 존슨이 정확한 정보를 전달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의하면 평범한 농부들이 암살과 납치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들이 사이공 정부에 충성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부인과 아이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있었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의 불법 침략과 비인간적인 행위를 막을 의무가 있었다. 존슨은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국내 정치문제를 고려해야 했다
누가 베트남을 잃도록 했는가와
관련된 논쟁은 중국 상실로 인한
논쟁보다 파괴적이리라 보았다
이것은 동시에 경제전쟁이었다
동남아시아 시장 축소는 미국의
파트너인 일본한테 민감했다
동남아는 일본 경제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였던 것이다
볼, 클리퍼드, 케넌, 드골의 반대논리 공산주의 중국의 검은 그림자가 동남아시아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는 것이 마지막 이유였다. 베이징(북경)은 하노이의 지배자들을 조종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티베트의 자유를 파괴하고, 인도를 공격하고, 한국을 침략한 중국이 이제는 베트남을 통해 동남아시아 전체로 그 힘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이유로 1954년 프랑스가 베트남으로부터 나간 이래로 위험에 빠져 있는 남베트남의 건설과 안보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존슨의 설명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떠난다면 베를린에서 타이까지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들의 자신감을 흔들어놓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존슨은 이렇게 국민들에게 베트남 개입이 불가피함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공산주의자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네가 여기까지 왔지만,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욥기 38장 11절) 존슨의 이러한 결정에 모든 관료들이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국무부 차관이었던 조지 볼은 1965년 7월1일자 문서를 통해 베트남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미국이 정글 속의 게릴라전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약 인명 손실이 늘어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북베트남과 전쟁을 하게 되더라도 중국의 참전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이 세계적 차원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이는 냉전 시기 세계의 주변부에서 일어난 전쟁에 적용되던 ‘제한전’의 원칙으로, 한국전쟁 시기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전략 역시 제한전 전략에 기초하고 있었다. 볼이 또 하나 강조한 것은 미국 정부가 남베트남 정부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베트남 정부가 해 달라고 하는 것을 모두 해 주다 보니 결국 미국의 이해관계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볼 차관뿐만 아니라 1968년 로버트 맥나마라의 후임으로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는 클라크 클리퍼드 역시 개입에 반대했다. 클리퍼드는 하노이의 패배를 러시아와 중국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제한전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국 냉전정책의 창시자 조지 케넌 역시 베트남 개입에 반대했다. 가장 큰 이유는 베트남이 전략적으로 볼 때 미국한테 그다지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66년 미국 상원 베트남 청문회에 선 케넌은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다른 사태의 전개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오히려 베트남 개입으로 인해 더 중요한 다른 지역에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15년 전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비판했던 케넌의 입장에서 볼 때 하노이 정부가 중국 정부처럼 공산주의의 형님들로부터 자유로운 독자적 행보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역시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대한 비판의 또 다른 초점이었다. 공산주의권은 일원적이지 않으며, 소련은 그 자체로서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설혹 하노이가 베트남 전체를 장악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가만히 두어도 미국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상원의원들 앞에서 도미노효과 역시 그다지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즉,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의 ‘빨갱이 사냥’과 같이 주변국들의 반공정책이 성공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확산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군사적 압박은 적들의 양보를 가져오기보다 중국군의 개입을 부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무엇이 미국 정부를 한 방향으로 몰아갔나 미국 내부의 반대보다 더 큰 반대는 프랑스로부터 왔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베트남 개입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에게 경고했다. “당신이 노심초사하는 이데올로기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도차이나에서 우리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고, 지금은 우리가 이미 꺼버린 전쟁의 촛불을 다시 붙이려고 한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미국은 끝없는 전쟁과 정치적인 수렁에 천천히 휘말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국내외로부터 많은 비판이 있었음에도 케네디는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결정했고, 후임자 존슨은 개입을 더 확대했다. 왜 이러한 반대 입장이 무시된 것일까? 퇴임 후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온 존슨 대통령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볼 차관의 제안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볼 차관의 제안이 있은 직후 국무회의가 열렸다. 국무회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러나 볼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존슨은 베트남에서 철수한다는 것은 공산주의가 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중동과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제3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무장관 딘 러스크 역시 이러한 의견에 찬성했다. 결국 존슨이 내린 결정은 케네디의 개입정책을 계승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파병과 군사적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추가 파병 없이는 하노이에 대해 승리할 수 없다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한국군의 파병을 결정할 때 박정희처럼 존슨 역시 베트남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백악관에서, 그리고 캠프데이비드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았다. 그 결과 내려진 결론은 전임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케네디의 정책을 재확인한 것이었고, 그의 선택에 대해 정부 내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954년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였다. 1945년 일본 군국주의가 패망했을 때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역시 두 지역으로 분할되어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진행되었고, 그 결정은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규정했던 미국의 일반명령 1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의 항복 이후 베트남에 대한 주도권은 1954년까지 프랑스가 잡고 있었다. 미국의 개입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서 호찌민의 군대에 대패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54년 한반도에서 전쟁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개최된 제네바 회담이 결렬된 직후 미국은 소련, 중국과 함께 17도선을 중심으로 베트남을 분단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몇 차례에 걸쳐 베트남에 개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특히 행정부가 교체되는 시기에는 대외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재고가 필요했기 때문에 베트남 정책 역시 재검토되었다. 아이젠하워에서 케네디로, 케네디에서 존슨으로, 존슨에서 닉슨으로. 정책의 재검토가 이루어질 때마다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의견이 함께 제기되었다. 하나는 동남아시아 전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그리고 중국의 세력이 동남아시아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트남에 대한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견해였다. 다른 하나는 베트남의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었다. 결정은 한 방향으로 회귀되었다. 상황이 낙관적이지 못한 것은 인정하지만,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실패했지만,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성공할 것이라는 자가당착적 평가도 계속되었다. 닉슨은 베트남에서 전쟁을 끝내고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공언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 것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4년이 지나서야 가능했다. 무엇이 미국 정부를 한 방향으로 결정하게 했던 것일까? 볼과 케넌의 혜안은 왜 무시된 것일까? 드골 대통령의 충고에서 나타나듯이 ‘냉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데올로기 전쟁에 대한 강박관념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데올로기 전쟁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의 확대는 세계적 차원에서 시장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남아시아 시장의 축소는 미국에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던 일본한테는 더욱 민감한 문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일본에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고, 동남아시아는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였다. 35년간 식민지 지배를 했던 한반도에 대해서는 배상금을 주지 않으면서 5년 남짓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지역에 배상금을 준 것은 이러한 정책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수행했던 ‘제한전’의 교훈? 미국 내 정치적 문제 역시 중요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베트남 문제를 언급할 때 ‘냉전’과 ‘도미노이론’을 지적하지만,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는 국내 정치 문제 역시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문제였다. 대통령에 재선되기 위해서, 그리고 여당이 상하원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내 정치를 고려해야 했다. 존슨 대통령은 1971년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만약 우리가 베트남에서 나온다면 미국 내에서 파괴적인 논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중국이 대륙을 차지했을 때 이런 논란이 있었다. 물론 베트남의 경우는 다르다. 그러나 누가 베트남을 잃도록 했는가와 관련된 논쟁은 어쩌면 중국의 상실로 인한 논쟁보다도 더 파괴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논쟁은 우익, 좌익 모두로부터 고립주의로 전환하라는 압력을 받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유럽과 중동에서 우리의 공약들을 모두 철회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949년 중국의 공산혁명은 당시 트루먼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소련의 핵개발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매카시즘을 불러왔다. 매카시즘은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견될 정도로 미국의 지성사회를 피폐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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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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