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6) 한국전쟁의 유산
전쟁과 관련해 최근 가장 많이 이용되는 이론이 ‘구성주의’다. 구성주의 이론은 전쟁이 발발하게 된 사회구조적 모순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던 기존의 논의에서 벗어나 ‘지도자들이 도대체 왜 전쟁을 결정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유사한 위기와 갈등의 상황에서도 어떤 경우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어떤 경우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전쟁으로 갈등과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고 결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분석해야만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구성주의에 의하면 정책결정자들은 전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전쟁으로 인해 치러야 하는 비용을 계산한 뒤 만약 이익이 손해보다 크다고 판단하면 전쟁을 하는 것이고, 손해가 크다고 판단되면 전쟁보다는 협상을 선택한다. 정책결정자들의 판단에 따라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북베트남 폭격은 있었지만
그들과의 전면전은 없었다
한국전쟁에서의 ‘제한전’을
베트남에도 적용한 결과였다
중국 참전 가능성 때문이었다
한비자에 나오는 ‘수주대토’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는
토끼를 본 농부가 똑같은 일이
벌어지기만 기다렸다는 말이다
과거 경험에 갇힌 미국이 그랬다
존슨, 1950년 매카시 선풍을 떠올리다 구성주의에 근거해서 설명할 수 있는 전쟁의 예는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한국에 그 적나라한 예가 있다. 1949년과 1967년은 모두 안보위기의 시기였다. 1949년은 주한미군 철수를 전후하여 남북한 사이의 38선 분쟁이 격화되어 있었다. 1967년에는 1년간 400회가 넘는 남북간 충돌이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했고, 1968년 초에는 북한 게릴라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1949년의 이듬해인 1950년에는 전쟁이 발발했고, 1967년의 안보위기는 전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1950년 당시의 정책결정자들, 즉 북한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해야만 모든 갈등이 해결된다고 판단했지만, 1960년대 중후반 시기의 정책결정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당시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면서 주한미군을 유지했던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의 판단은 그러했다. 베트남전쟁의 경우 이 이론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미국이 왜 개입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미국은 전쟁에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쉽게 나올 수 있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전쟁에서 목적을 달성한다고 믿었고, 베트남에 개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치러야 할 손해보다도 더 크다고 판단했다. 굳이 복잡한 이론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가 얻을 것이 없는 전쟁에 개입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당시 정책결정자들은 전쟁 개입에 대한 반대를 물리치고 왜 얻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을까? 적극적 개입을 결정했던 존슨 대통령은 미국 국내 정치 문제를 가장 많이 고려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베트남 개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국내 정책에서 나타나는 비용을 상쇄시켜주리라 판단했다. 반대로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을 경우 큰 손해를 본다고 보았다. 그는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많은 정책결정자들은 역사에서 길을 묻는다. 존슨 행정부 시기의 정책결정자들 역시 역사로부터 길을 찾고자 했다. 동아시아의 많은 지도자들이 오래된 역사로부터 그 길을 찾고자 고전을 선택했다면, 존슨 행정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로부터 그 길을 찾고자 했다. 바로 한국전쟁과 그 전후 시기의 경험이었다. 존슨은 미국이 중국 대륙을 잃었을 때 불었던 매카시 선풍의 경험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미국이 세계를 관할하는 강대국이자 제국이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은 정치인이고, 그에겐 국내 정치가 가장 급했다.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근근이 실패하지 않고 끌어왔던 베트남 정책이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시기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루스벨트 행정부와 트루먼 행정부가 1949년 중국에서 실패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쓴 것과 같은 결과가 존슨 행정부에도 재현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존슨은 어쩌면 중국의 경우보다도 더 큰 재앙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통해 길을 물은 것은 국내 정치 문제뿐이 아니었다. 베트남에서의 세계전략과 군사전략에서도 동일했다. 특히 15년 전에 있었던 한국전쟁은 존슨 행정부의 정책결정자들과 군사전략가들에게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그 첫번째 유산이 ‘제한전’을 주요한 전략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북베트남에 대한 선전포고가 없었다 ‘베트남에서 미국이 왜 승리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흔한 답변은 ‘미국이 베트남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군사전략적 관점에서의 답변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미국 육군대학에서 연구를 수행했던 서머스(Harry G. Summers, Jr.)는 그러한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군사전략 전문가다.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할 수 있는가? 선전포고는 적을 명확히 하고 왜 그들이 적이며, 왜 그들과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규정한다. 여기로부터 내가 그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와 동기가 분명해진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병사들에게 왜 저들이 적이고, 왜 저들을 죽여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 전쟁은 시작부터 잘못된 전쟁일 수 있다. 통킹만 사건 이후 존슨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전쟁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나 의회가 북베트남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다. 과연 누가 가장 결정적인 적인가? 북베트남인가? 아니면 북베트남의 도움을 받아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던 남베트남의 베트콩인가? 남베트남의 게릴라들과 북베트남에 대해서 호의를 갖던,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사람들은 적인가, 아닌가? 미군들에게는 진격할 목표가 없었다는 사실 역시 전투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남베트남의 베트콩이나 북베트남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미국에 의존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베트남 정권을 물러나도록 하고, 북베트남의 주도 아래 베트남 통일을 달성하는 목표였다. 그러나 미군들의 목표는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는 것이었다. 남베트남 안에서 베트콩들의 영향 아래 있는 지역들로 진격하여, 이 지역들에 남베트남 정부의 통제가 미칠 수 있도록 하는 것 외에는 베트콩의 공세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임무였다. 게다가 베트콩들을 지원하고 있던 북베트남으로의 진격도 허용되지 않았다.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은 있었지만,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은 없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적용했던 ‘제한전’이었다. 미국은 왜 베트남에서 ‘제한전’을 적용했을까? 미국 군부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에서의 제한전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했다. 1950년 시작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팽창 의도를 제한전을 통해 막을 수 있었다. 미국이 비록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처음에 목표로 했던 38선 회복이라는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했다. 미국이 비록 중국이라는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힘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제한전만으로도 완충지대 형성을 통해 더이상 팽창하지 못하도록 제어할 수 있었다. 이는 ‘제한전’의 전략적 승리였다는 것이 미국 군부의 판단이었다. 제한전을 고려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 문제였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전략은 처음에는 제한전으로 시작했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이북으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제한전 전략에서 롤백(rollback)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문제는 롤백 전략으로의 전환이 결코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롤백 전략은 오히려 중국의 참전을 불러왔고, 이로 인해 미국은 전쟁 전략을 다시 제한전으로 전환했다. 롤백 전략은 중국을 초대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데 일조했다. 중국의 참전을 불러온 롤백 전략은 또한 미군한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중국군이 참전한 1950년 10월 중순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미군이 입었던 피해 중 가장 큰 피해는 중국군 참전 직후부터 1·4 후퇴까지의 시기였다. 지금도 미국 전사에서 기념비적으로 기억되는 전투가 장진호 전투이다. 장진호 전투는 밀려오는 중국군에 맞서서 싸웠던 미 해병대의 전설 같은 전투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이 전투에서 미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베트남에서 미국이 만약 제한전 대신 북베트남을 전면적으로 침공하는 롤백 정책을 실시한다면, 중국은 이에 대해 어떠한 대책을 세울 것인가? 존슨 정부의 군사전략 전문가들은 한국전쟁과 유사한 결과를 불러오리라 보았다. 즉, 중국이 참전할 것이고, 이는 미군에 재앙이 될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판단했다. 조지 볼 차관이 미국의 적극적 개입에 반대하면서도 만약 미군이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면,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 지역에 대한 폭격과 전투를 피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교훈 몰랐나 한국전쟁을 통해 형성된 중국에 대한 트라우마는 이미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1954년 처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이 동남아시아 전체에서 자신의 정치체제를 강요할 수 있다고 염려했다. 케네디가 베트남에 대한 개입 정책에 아이젠하워보다도 더 속도를 낸 것은 대외전략에 있어서 중국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한 전략이었다. 케네디는 암살되기 직전인 1963년 9월2일에 있었던 연설에서 남베트남 정부의 붕괴는 동남아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고, 여기에는 중국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1962년 케네디의 베트남 전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상원의원 마이클 맨스필드의 보고서에서도 중국의 베트남 및 동남아시아에 대한 전략이 가장 중요한 변수로 설정되었다. 베트남 주둔 미군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인 1977년 베트남전쟁을 회고하면서 미국의 모든 전략은 “중국의 개입에 대한 공포”를 고려하면서 수립되었다고 술회했다. 존슨은 후에 회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전쟁을 통해 모든 아시아는 또 다른 실재를 보게 된다. 공산중국의 깊은 그림자이다. (중략) 중국의 힘은 동남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한다.” 존슨은 결국 중국이 핵무기 실험에 성공하는 1964년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선언했다. 미국이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케네디에 의한 것이었는지 존슨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19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비해 더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결정했다. 이는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휴전 상태에 들어간 지 10년이 채 되기 전의 일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해외에 대한 개입을 꺼렸다. 베트남에 적극적 개입을 하고 싶었지만, 한국의 경우처럼 대규모 파병을 한다면 고비용, 저효율의 결과가 남을 것이며, 결국 미국 정부의 재정 악화를 초래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저비용 고효율을 위한 비밀 작전을 선호했고, 중앙정보국(CIA) 활동을 강화했다. 필리핀의 비밀 작전에서 큰 성공을 거둔 에드워드 랜스데일을 베트남에 보냈고, 응오딘지엠(고딘디엠) 남베트남 대통령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질려 있던 아이젠하워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승만보다는 조용한’ 응오딘지엠이 시아이에이의 지원을 통해 성공적으로 집권할 것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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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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