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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04 19:10 수정 : 2014.04.07 09:52

미국은 중국이 한국전쟁에서처럼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대규모 참전할 수도 있다고 예측했지만, 전후 상황은 전혀 달랐다. 1979년 2월17일 베트남을 침공한 뒤 중국-베트남 국경 부근인 까오방의 전장에서 베트남 여전사들에게 체포된 중국군들의 모습. 유튜브 화면 갈무리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7) 북베트남과 중국의 갈등

* 도미노 이론 : 세계 연쇄공산화

1978년 700차례가 넘는 국경충돌에 이어 급기야 1979년 2월17일 중국은 베트남을 침공했다. 1978년 12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이 있은 지 두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당시 중국은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있던 크메르루주를 지원하고 있었고, 베트남은 중국의 인도차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했다. 크메르루주는 집권 후 150만명 이상을 학살해 영화 <킬링필드>(Killing Fields)의 무대를 만든 정권이었다.

중국 정부는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으며,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인용했다. 비록 문화대혁명으로 지친 중국군이 25년간 전투를 통해 단련된 베트남 군을 압도하지 못했지만.

어떻게 된 것인가? 토끼가 나무에 또 부딪힐 것이라고 생각했던 농부처럼(수주대토·守株待兎) 미국은 중국이 한국전쟁에서처럼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대규모 참전할 수도 있다고 예측했지만, 전후의 상황은 미국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1972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병으로 쇠약해진 마오쩌둥(모택동) 대신 저우언라이(주은래)가 닉슨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다르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타이완(대만)에 제7함대를 보냈고,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왔다. 그러나 베트남은 다르다. 만약 베트남에서 대결하면 미국과 중국이 모두 막대한 피해를 볼 것이다. 결국 중국은 베트남에서 미국과 대결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마오 대신 저우언라이와 긴 대화
그는 중국이 베트남에서 미국과
대결할 뜻 없음을 분명히 했다
과연 수사였을까, 진실이었을까

베트남을 그대로 놔뒀더라면
공산화됐어도 아시아 제2의
유고슬라비아 됐을 가능성 높아
티토는 공산권 내에서 소련의
패권에 가장 먼저 반기 들었다

대중국 관계, 한국과 베트남은 어떻게 달랐나

일생을 통해 베트남 역사를 천착해 온 유인선 선생은 그의 역작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을 통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베트남과 중국의 양면적 관계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지배와 항쟁’, ‘조공과 방교’ 그리고 ‘우호와 갈등’이라는 제목으로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를 규정했다. 국경을 접한 중국과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밀고 당기는 길항관계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어쩌면 중국과 한국의 관계와 너무나 유사하다. 유럽의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과 동맹과 연합의 방식을 통해 생존을 도모했다면,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 생존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아시아에서 중국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베트남과 한국처럼 중국과 국경을 접하면서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경우 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했다. 강대국 중국과 베트남·한국 사이에는 ‘갑을관계’가 형성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공’이라는 특수한 외교적 관계가 수립되었다. 국제정치에서 말하는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 정책이 유럽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편승’(bandwagon) 정책이 필요했다.

물론 한국과 베트남이 중국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근대 시대 한국은 오랜 기간 통일된 왕조를 유지했지만, 베트남은 분열과 통일을 거듭했으며, 중국으로부터의 외침 역시 적지 않았다. 한국이 이미 통일왕조를 형성한 지 300년이나 지난 10세기에 이르러서야 베트남은 독립왕조를 수립했다. 그나마 중국과의 관계가 평화적으로 유지되지 않아 몇 차례에 걸쳐 중국과 큰 분쟁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조공 관계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북거’(北拒: 북을 막는다) 관계로 부르기도 한다.

베트남은 중국에는 밀리면서도 인도차이나 지역 내에서는 골목대장이었다.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중국의 또 다른 주변국인 캄보디아나 라오스에 비해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힘을 갖고 있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했다. 따라서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조공체제 안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특히 19세기 초 소수민족 정권이었던 청에 대해서는 대등한 관계 내지는 스스로가 중국(中國)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주의자 호찌민 사이에는 이념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는 우호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양국 간의 우호적 관계는 중국의 내전 시기(1945~1949년) 국민당의 공세를 피해 중국 공산당의 남광둥(南廣東) 1연대가 베트남으로 피신하는 등 호찌민이 중국에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 중국의 적극적 도움을 통해 호찌민의 군대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는 사실(1953~1954년)과 무관하지 않았다. 중국으로서는 1953년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군사적 원조를 베트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중국의 주위에 위치한 한반도, 대만 그리고 인도차이나에서 모두 미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던 프랑스의 힘을 봉쇄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며, 호찌민으로서는 사회주의 동지국인 중국의 호의적 원조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양국 사이의 우호적 관계는 1954년의 제네바 회의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호찌민은 디엔비엔푸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베트남을 통일하고 프랑스를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은 달랐다. 한국전쟁으로 미룬 혁명 수행을 위해서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오랜 기간 계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또 다른 인도차이나 국가인 라오스에 대한 베트남의 우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호찌민은 중국의 입장을 받아들여 17도선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의 분단과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독립 인정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베트남 사람들의 뿌리 깊은 중화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베트남 게릴라 승인을 둘러싼 의견차이

1950년대 말 남베트남의 게릴라들이 응오딘지엠(고딘디엠) 정권에 반대하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할 때도 북베트남 정부와 중국 정부 사이의 갈등이 나타났다. 중국은 1950년대 후반까지도 베트남의 통일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토지개혁과 재건 과정에서 중국의 원조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북베트남은 응오딘지엠 정부에 대한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1959년에 가서야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반정부 세력의 무력투쟁 방침을 승인하는데, 이 과정에선 중국의 노선 변화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1950년대 중반까지 중국은 베트남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지만, 1950년대 후반 중-소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적극적인 정책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베트남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자 중국은 국제적으로 가장 먼저 이를 승인했다.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된 또 다른 사건이 이 시점에서 발생했다. 라오스 문제의 해결을 위해 1961년 5월에 개최된 제네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중국과 북베트남은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과도 대척점에 서서 라오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는 미국과의 유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라오스 문제에 대한 존 케네디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중국과 북베트남은 라오스의 사회주의 애국전선을 지지했다. 그러나 양국은 동상이몽의 관계였다. 중국은 라오스에 대한 북베트남의 영향력을 제어하면서 중국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한 반면,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기 위한 라오스 내의 루트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인도차이나 연방’ 형성의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베트남과 중국 사이의 갈등은 1962년 케네디 행정부가 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지원을 결정하면서 수면 밑으로 잠복했다. 호찌민은 1962년 중국을 방문해 대규모 지원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이를 승인했다. 마오가 실권을 하고 상하이로 내려가 있었던 시기에도 저우언라이를 통해 북베트남과 라오스에 대한 강경 정책(평화협정 반대)은 계속되었다. 특히 소련이 1963년 북베트남한테 채무 상환을 요구하고 이듬해 소련의 지원이 급감하자, 북베트남은 중국과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린든 존슨 행정부에 의한 대규모 파병은 베트남과 중국의 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던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 전인 1964년 7월 저우언라이는 하노이에서 북베트남 및 라오스 애국전선 지도부와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중국은 ‘동남아시아 인민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이라도 사용하겠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중국은 미국이 북진해 올 경우 육군을 파병해서 북베트남을 지원하겠다는 것을 약속했다.

중국의 적극적 지원 약속을 고려한다면 존슨 행정부가 예상했던 ‘중국 개입에 대한 트라우마’는 단지 트라우마가 아니라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실제로 중국은 미국의 롤백(Rollback) 정책이 없었음에도 1965년부터 고사포 부대와 함께 철도 건설, 도로 보수 등을 위해 30만명이 넘는 병력을 북베트남에 파병했다. 1967년에는 약 17만명의 병력이 북베트남에 주둔했다. 물론 이들은 후방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고, 전선은 북베트남 군인들이 담당했다. 그래서 지금도 베트남의 역사학자들은 베트남전쟁 시 중국의 지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만약 미국의 적극적 전략이 없었다면 중국과 베트남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가까운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노”라면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주장했던 도미노 이론은 잘못된 것이었다. 베트남을 그대로 놔두었다면 공산화는 되었을지언정 베트남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유고슬라비아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는 공산권 내에서 소련의 패권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들었다. 만약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베트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서도 갈등관계가 조기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베트남이 통일된 지 채 4년도 지나지 않아 발생했던 양국 간의 충돌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다른 질문도 필요하다. 19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양국 사이의 협력관계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는가의 문제이다. 이 질문은 위에서 언급한 저우언라이와 닉슨 사이의 대화가 진실인가 아니면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는가를 판단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968년 이후에 일어났던 새로운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1968년 구정(설)공세 이후 베트남과 중국의 또다른 갈등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외무부에서 1979년 10월4일 발행한 <중국백서>(원제는 The Truth about Viet Nam-China Relations over the Last 30 Years)에 따르면, 중국이 구정공세에 대해 비판했고, 경화기·탄약·후방장비만 지원하면서 베트남전쟁의 조기 종결에 반대했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중국의 원조는 1968년을 기점으로 해서 대규모로 삭감됐다. 1968년에 비하여 1969년에는 20%, 1970년에는 50%로 감소했다.

“미국 이기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 끊어라”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대해서도 중국은 하노이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소련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과 중국의 접근은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불신을 증폭시켰다. 중국은 미국과의 접근에 앞서 북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증가시켰으나, 하노이 쪽에서는 중국이 스스로의 배반을 은폐하기 위한 조처로 판단했다. 하노이 정부는, 중국이 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을 이용하고 있으며, 중국은 미국과 베트남 문제를 논의할 권한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1972년 춘계 공세 이후 양국 간의 견해차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1973년 1월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1975년 남베트남 정부가 몰락했고,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건설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소련이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늘린 것 역시 통일 후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재현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1968년 이후 미국이 전선을 북베트남으로 확대해 들어갔다면 중국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북베트남을 원조하려고 했을까? 특히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에드거 스노를 중국에 초청한 1970년의 상황을 고려하면 미국의 롤백정책이 1970년의 시점에서 추진되었다면 한국전쟁 시기와 동일한 사태가 발생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역시 “만약”이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미국의 제한전쟁 전략, 중국의 개입에 대한 트라우마가 올바른 판단이었는가를 정확히 규명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미국이 판단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북베트남과 중국 사이에는 불신과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도미노 이론은 잘못된 판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북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던 미국으로서는 군사전략에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베트남 내부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하면서 이 전쟁에 들어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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