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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18 19:13 수정 : 2014.04.20 12:20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8) 응오딘지엠의 최후

1963년 11월1일 남베트남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궁지에 몰린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옛날식 표기는 ‘고딘디엠’)은 베트남 주재 미국대사 헨리 캐벗 로지에게 전화를 했다.(자료: Telephone conversation between Diem and Lodge, November 1, 1964, FRUS 1961-1963, 4권, 513쪽)

지엠: 몇몇 부대가 반란을 꾀하고 있습니다. 난 미국의 입장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로지 대사: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을 만큼 알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총소리를 들었지만, 모든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지금 워싱턴은 새벽 4시30분이라서 미국 정부가 스스로의 입장을 표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엠: 그러나 전반적인 판단이 있지 않겠어요? 결국 나는 이 나라의 수장입니다. 나에게는 내 의무가 있습니다. 내 지위에서는 의무와 판단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나는 의무를 믿습니다.

로지 대사: 당신은 당신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말한 것같이 당신의 용기와 공헌에 대해 크게 평가합니다. 당신이 한 모든 것에 대해서 누구도 그것을 당신으로부터 뺏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의 육체적 안전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쿠데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약 당신이 사임한다면 당신과 당신의 동생을 외국으로 안전하게 망명시키겠다고 제안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들어보았습니까?

지엠: 아니요. (잠시 쉬었다가) 당신은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죠?

로지 대사: 네. 만약 당신의 안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전화하시오.

지엠: 나는 지금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승만과 베트남의 지엠
미국의 지원과 원조가 없었다면
대통령직 유지 못했을 두 사람
이들을 반대하는 미국 인사가
많았던 점도 둘의 공통점이었다

냉전 이데올로기는 눈을 가렸다
이승만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엠도 대중적 지지 못 받았지만
미국은 선글라스 쓰고 눈감다가
최후의 순간 선글라스를 벗었다

지엠은 이승만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

통화 내용은 4·19 혁명 직후 이승만과 주한 미국대사 월터 매카너기의 대화, 5·16 쿠데타 직후 장면 총리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 마셜 그린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 모두 미국의 후원을 받았고 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을 호소했지만, 결정적 순간 미국은 등을 돌렸다. 지엠 역시 주베트남 미국대사와 통화를 하면서 자신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다. 그는 미국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이승만이나 장면과 달리 통화 후 이틀이 지나 쿠데타군에 의해 죽었다. 통일 총선거를 하기로 했던 제네바 합의를 깨고 1955년 10월26일 남베트남 단독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지엠의 정권은 쿠데타 한 방으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1955년 선거에서 45만명의 등록 유권자보다 많은 60만표를 획득했던 독재자의 최후였다.

지엠은 이승만처럼 미국의 지원 아래서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대통령에 오르지도 못했고, 미국의 원조 없이 정부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게다가 미국 내에서 이들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 역시 또 다른 공통점이었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추진, 지원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미국이 지지했던 장덕수는 이미 암살되었고, 김규식은 총선거를 거부한 상황이었다. 특히 미국의 국무부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지엠에게는 눈에 띄는 경쟁자가 없었고, 강한 반공주의자였지만, 미국 정부 내에서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동시에 존재했다. 그가 남베트남의 정부 수반이 되었던 1955년 미국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NSC) 안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당시 국무부 장관이면서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친형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북베트남 출신인 지엠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베트남에 있었던 윌리엄 콜비 시아이에이 지부장도 지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52년과 1953년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유엔의 깃발 아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 군대를 파견했는데, 막상 보호하고 있는 정부는 민주적 정부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추진하는 정전협정에 반대하면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화가 난 미국 정부는 두 차례에 걸쳐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다. 비밀리에 세운 계획은 전쟁 중이라는 점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대체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이유로 실행되지 못했다.

지엠과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주베트남 미국대사였던 엘브리지 더브라우는 지엠이 집권 이후 ‘주목할 만한 성공을 달성’했다면서 안보와 안정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비록 경제적 성과나 대중적 지지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지만, 안정적으로 반공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데 만족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지엠이라는 ‘패’를 버리지 못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1953~1960) 내내 부정적 견해가 올라왔음에도, 그는 매력적이었다. 특히 1960년 초에 열린 국가안보회의 회의에서는 ‘지방에서 다양한 반란이 일어났고, 부패를 조장하고 있다’는 남베트남의 상황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지엠이 ‘이승만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조용하고 매력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지엠이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라고 보았던 것인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지엠을 돕기 위해 시아이에이 요원 에드워드 랜즈데일을 보냈다. 1948년 필리핀에 숨겨져 있던 일본군의 금을 찾는 ‘인디아나 존스’ 노릇을 했던 그는 필리핀의 농민군들을 진압하고 1953년 12월 미국이 지원하는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인물이었다. 랜즈데일은 지엠을 막후에서 지원했다. 가정교사와 같은 구실을 했던 것이다.

수많은 남베트남인들은 왜 게릴라가 됐을까

그의 역할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음에도, 케네디 행정부(1961~1963)는 시아이에이 활동의 성과를 믿었다. 또한 랜즈데일을 재차 파견했고, 지엠을 계속 지원했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특사로 베트남을 방문했던 린든 존슨 부통령은 지엠 대통령을 ‘베트남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웠다. 라오스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라오스에서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싶지 않았던 케네디 행정부는 제네바에서의 협의를 통해 라오스 문제에 대한 타협점을 찾았지만, 베트남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군 병력 증강을 통해서라도 지엠 정부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1963년 초까지 2만5000명이 파병되었는데, 그중 1만6732명은 군사고문의 역할을 했고, 원조는 연간 4억달러에 이르렀다. 1950년대 단일 국가로서는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았던 한국이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았던 해는 1958년이었고, 그 액수는 3억2000만달러였으며, 그 이후로는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케네디 대통령보다도 그의 후임 존슨 대통령의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지원 규모는 더 컸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가 암살당하기 직전인 1963년 9월까지도 베트남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지원이나 개입이 있다고 하더라도 큰 효과를 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존슨은 1961년의 베트남 방문을 통해서 받았던 긍정적 인상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더 적극적인 개입의 방식을 결정했다. 존슨 대통령은 1965년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첫 번째 사실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의 독립국가를 공격했다는 점이다. 그 목적은 총체적 정복이다…(중략)…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전쟁이다. 농민들이 암살과 납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자와 아이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정부에 충성한다는 이유로 교살당하고 있다. 도움을 받지 못하는 농촌들은 공격에 의해 황폐해졌다. 지방의 주요 지역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발생하고 있으며, 도시의 심장부에서는 테러가 발생하고 있다.”

존슨의 인식은 당시 남베트남의 상황을 사실 그대로 반영한 것일까? 한국전쟁처럼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침공했는가? 아니면 남베트남의 반정부 게릴라를 지원했는가? 농민과 그 가족들이 피해를 입었으며, 이로 인해 농촌과 도시가 피폐해지고 있었음은 사실이었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을까.

존슨은 자신의 전임자들이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그 목적은 ‘남베트남 사람들이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스스로 원하는 대로 국가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베트남 사람들이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면, 왜 반정부 게릴라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을까? 수많은 남베트남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게릴라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미국은 왜 자신들이 지원했던 지엠 대통령을 스스로 끌어내린 것인가? 이승만에게도, 사담 후세인에게도, 그리고 탈레반에 대해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시점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주말이 지나면서 사이공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지난 3개월 동안 쿠데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워싱턴과 사이공 정부의 관계를 갈라놓았다.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반대했고, 로버트 맥나마라는 부분적으로 반대의 입장이었다. 윌리엄 해리먼, 조지 볼, 로저 힐즈먼 등이 이끄는 국무부는 찬성의 입장이었고 백악관의 마이클 포레스털 역시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다.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었다. 우리는 8월 초에 쿠데타를 제안했었다. 그 전문은 잘못 만들어진 것이었고 (베트남 주재 미국대사관에) 보내지지 말았어야 했고, 회의에서 찬성하지 말았어야 했다. 케이블은 후에 수정되었지만, 첫 번째 전문은 로지 대사를 고무했다. 그리고 이후 남베트남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은 더 나빠졌다. 나는 지엠과 (그의 동생) 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몇 년 전 지엠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10년 동안 남베트남을 이끌어왔다. 그는 역겨운 범죄에 의해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이공에 멀지 않은 미래에 어떤 정부가 들어올 것인가의 문제이다.”

미국이 쿠데타를 조종했다는 의혹

미국은 배후에서 쿠데타를 조종한 것인가? 지원했던 정부를 끌어내린 것인가? 케네디 행정부 시기 베트남에 파견되었던 미군 고문단원 중 한 사람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지엠 정부가 승려들을 탄압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탄압하는 독재 정부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당시 워싱턴에서는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알지 못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데올로기는 눈을 가렸다. 객관적인 사실과 상황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색안경에 의해 다르게 읽혔다. 평가의 기준은 이데올로기였다. 지엠도, 이승만도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미국은 선글라스를 쓰고 이에 대해 눈을 감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 그 선글라스를 벗었다. 중국의 시장을 열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관점도, 북한을 열어야 경제·안보에서 실리를 취할 수 있다는 입장도, 냉전의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4·19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미국은 선글라스를 벗었지만, 베트남에서는 도미노 이론이라는 또 다른 두꺼운 색안경으로 인해 선글라스를 벗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전선의 병사들은 이데올로기에 가려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것이었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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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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